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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평지平地에 이르러

시집 《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다시 평지平地에 이르러 다시 평지에 이르러 다시 평지에 이르러 다 잊어버렸습니다 기억나는 건 붉은 색 망토 입고 하늘을 날던 기쁨과 그 기쁨 배가하려 청록계곡 어딘가에 머물며 가쁜 숨 몰아쉬었던 어설픈 욕망의 시련 뿐 이제까지 온 감사함에 대한 예의도 날 수 있었던 건강함도 저 만치 보이는 ‘조금만 더’ 의 과욕 만을 따랐을 뿐 계곡 맑은 물 속 양손 집어넣고 느낀 청량함은 그 때뿐이고 구름 속 날개 부딪히는 신선함을 그저 당연시 한 나는 받고 먹을 줄만 아는 에고이스트 그 한계는 그 때 뿐 이어야지요 산맥이 기지개를 켜고 그를 재운 산하는 아직 여전한데 나는 내려앉아 숨을 고르고 자아는 춤을 추며 또 다시 날아오를 생각에 상념의 평화를 채우고 있습니다 가..

2022.01.01

사랑하는 당신 아프지 마세요

사랑하는 당신 아프지 마세요 ㅡ 언제부턴가 병원 한두 군데 다니는 게 일상입니다 건강 최고라 믿었던 당신도 그러합니다 무더위 꺾여 찾아온 시린 계절에 당신 아프다는 말들이 절절이 내게 스며듭니다 사는 게 어찌 꽃 피는 봄날만 있으리오만 나도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이 하루에도 백 번 넘게 순응해야지 순응해야지 다짐하면서 그 징표의 실현으로 습관처럼 약을 입에 털어 넣습니다 신앙도 없는 사람이 보신적 갈구의 심정으로 스스로 구도자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그래도 이 말 만큼은 사랑하는 당신께 꼭 드리고 싶습니다 아프지 마세요 우리가 숨 쉬는 날까지 난 오늘 독감 예방접종 갑니다

2021.12.21

혼술 소묘

혼술 소묘 ㅡ 종종 단골 해장국집 가는 시간은 일부러 손님 뜸한 아침 11시 전후다 대다수가 나 같은 혼밥이라 편하다 한 쉰 먹었을 얼룩얼룩한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세상 고민 혼자 다 뒤집어 쓴 표정으로 터덜터덜 들어와 앞 테이블 의자에 털썩 앉자마자 "아줌마, 후레쉬 한 병에 내장탕!" 김치 깍두기가 밑반찬으로 놓이기 무섭게 물컵에 콸콸 소주를 따라 바로 목을 넘긴다 한눈에 보아도 세상에 목이 바짝 마른 생명이다 정작 내장탕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소주병은 싹 비워졌다 또 한 병의 소주병 목을 거칠게 비튼다 아침, 해장국집, 혼술, 혼밥, 두꺼비 문득 지금 이 장면이 아련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1986년 겨울 아침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내가 그랬으니까... (2021년 겨울 아침)

2021.12.19

타훼打毁(때려 부숨)

그림: 게리 번트(Gary Bunt, 1957~) 영국 켄트주 출신 화가, 시인. 음악 밴드 기타리스트, 건설현장 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 전전. 마약과 알코올 중독 등을 겪었다. 자기치료와 성찰의 ‘사색적 여정’을 그림으로 그린다 (from 진흠모 이돈권 시인). 시집 《'노량진 극장' 중' 우리글 2008》 타훼打毁(때려 부숨) - 순간의 분열이 가져온 파편은 이미 우주에 흩어졌다 눈치 없는 굼뜬 인간 몇몇이 때 늦은 회한에 손을 모아 다시 주우려 허우적거리지만 저 만치서 보고 있는 나는 팔짱 낀 채로 비웃고 있다 늦은 밤과 이른 새벽조차도 그들은 불만이다 밤이 늦어지는 건 낮에 불었던 바람 때문이라는 핑계지만 “흑심을 품고 미리 힘을 뺀 바로 네 잘못” 일 뿐이고 이른 새벽이 오는 까닭은 “너희가 일..

2021.12.15

자기 기준

자기 기준 ㅡ 3만 원이 넘는 짜장면 10만 원이 넘는 탕수육 얼핏 이해 안 가는 가격이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 호텔 중식당 가격입니다 혹자가 말하길 짜장면이 해 봐야 짜장면이고 탕수육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일맥 지당한 말씀이긴 합니다만 거긴 또 그곳만의 비싼 맛이 주는 경제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살고 있는 동네 인근을 잘 둘러보면 허름하고 오래된 중국집에는 의외로 정통 청요리 맛을 잘 내는 짜장면 탕수육 고수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횟집도 1인당 수십만 원짜리 오마카세가 있고 가까운 벗이 가 보았다는 한식 오마카세도 있답니다 문제는 자기 기준으로 그들 존재의 부정을 넘어 분노하고 증오하는 데에 있습니다 나는 1400원짜리 막걸리를 즐겁게 마시면 되고 당신은 당신의 술을 마시면 되지 않을까요

2021.12.13

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 ㅡ 종로 점심 약속 가는데 아파트 엘리베이터도 지하철도 기다림 없이 바로바로 탑니다 일부러 붐비는 시간 피한 단골 민물매운탕 집에서 항시 먼저 술값을 계산하는 젠틀맨 A에게 오늘은 꼭 내가 내야지 맘 먹고는 얼큰한 메기매운탕에 막걸리를 마시는 중에 화장실 가는 척 슬쩍 일어나 계산을 하고 오니 A가 주섬주섬 가방에서 뭔가를 꺼냅니다 ㅡ 이거 하나 샀어, 너 주려고 그 비싸디 비싸다는 G 초콜릿입니다 ㅡ 아이고 참나, 이거 원...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고맙구만! 지하철 귀갓길 보험회사 문자가 와 있습니다 아파트 현관에는 벗이 보내온 투박하게 포장된 산청 대봉감이 놓여 있었습니다

2021.12.10

고사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년 우리글》 고사 - 우리 어매 지성으로 아궁이 장작불 지펴 김 폴폴 올라오는 떡시루 팥고물이 넘친 시루떡이 폭 익을라치면 흰 광목 둘둘 말아 손잡이 만들어 묶고는 딱딱한 북어 대가리 잡아 푹 찔러 단단히 매어놓고 “그 쪽 들어라” 나와 마주 번쩍 들어 마룻장 위 쌀뒤주 옆 떡시루 자리 잡아 앉혀놓고 터주귀신 삼신할매 온 집안귀신 모두 불러들여 손 비벼 손금 닳고 닳도록 빌고 또 빌다가 따라 논 막걸리 한 입 물고는 다시 푸푸 뱉어 고수레 옥양목 고운 긴 치마 한 손 부여잡고 허리춤에 끼어 부엌 문지방 넘어 들어 고수레 떡 한 줌 떼어 변소에 뿌리고 막걸리 사발째 부어가며 고수레 아부지 작은 서재 재떨이 놓인 앉은뱅이책상 앞에서도 성질 좀 죽이라고 고수레 관운장 칼 쓰..

2021.12.06

우선순위

우선순위 ㅡ 선약을 깨는 일이 거의 없는 '나'지만 모처럼 선배가 청한 약속 날짜를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사정으로 미룰 것을 공손히 익스큐즈 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당연히 이해한다 누구나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니 한 주 미루자" 그래서 한 주 뒤에 만났습니다 그때 얘기 끝에 덧붙인 그의 말은 "나도 우리 후배에게 우선순위가 되도록 노력할게" '우리'가 먼저일 때 화학적 동질감이 생성되어 사랑이란 무형을 공동 소유하게 됩니다

2021.12.03

삼팔따라지 로맨티스트 이세복 아저씨

삼팔따라지 로맨티스트 이세복 아저씨 ㅡ 어린 시절 우리집 貰 살며 가족처럼 함께 살았던 아저씨네 어머니와 친구처럼 지냈던 아주머니 평양 사투리 피양에서는...고저...야래...이 애미나이 새끼... 아직도 그 목소리 귀에 선하고 학교 파하고 온 풍문여고 규율부 혜숙이 누나는 양푼에 열무김치 항아리에서 꺼내 고추장 얹어 참기름 한 방울 뿌려 썩썩 찬밥을 비벼 숟가락 하나 더 꽂아 이리 와 먹자! 둘이 아구아구 얼마나 퍼먹었던지.....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던 깜깜한 밤 청계천 기계 기술자 일 마친 아저씨가 술을 거나하게 기분 좋게 드시고는 따끈따근한 호떡 한 봉지 사 들고 푹푹 쌓인 눈에 빠지며 귀가했는데 아뿔싸! 큰 소리 부부 싸움 끝에 죄 없는 호떡이 마당에 내동댕이처졌다 아침 일어나 화장실 가려 마..

2021.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