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극장 22

옴니버스 스토리Omnibus Story

옴니버스 스토리Omnibus Story -  빌딩 숲에서 목구멍 넘어가는 자판기 커피 맛이새삼스러이 정나미 뚝 떨어지는 순간 여길 빨리 떠나고 싶다 네 명이 둘러앉아 소주에 삼겹살을 먹는데상추 물기 털어내며 씨팔조팔 어수선한 얘기 뻥 튀기듯 노가리만 푸는데 갑자기 고독하고 싶어 나왔다  어슴푸레한 저녁 높지 않은 산기슭 작은 바위 그 언저리 털썩 주저앉아 내려다보이는 도심 반짝거리는 불꽃들에이유 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조신했던 여자의 변덕이 죽 끓을 때참고 또 참다가 인내의 한계는 여기다 하고절교를 선언했다  눈 내리는 날 겨우 한두 사람 내려놓고 떠나는 간이역 기차 뒷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 그냥 역으로 갔다     ◎ 시집 《노량진 극장(2008,우리글)》 중에서

2024.12.03

7번 국도

쳇GPT는 詩를 어떻게 評할까요?;    7번국도 -  부산까지 안 내려가도 좋다   함경북도 온성까지 안 올라가도 좋다   그냥 동해바다   속초 강릉 주문진 삼척 울진 그 근방   은모래 백사장 소나무 숲 굽이굽이 품은 도로  수평선 붙은 하늘 항시 열려 있고   그 하늘 아래 산맥이 바다 향한 새벽 기지개 던지는 길   밉고   하기 싫은 것   여기 모두 던지라고   넉넉한 바다   골치 아픈 생각 이젠 그만 하라고   일직一直이룬 수평선   지금의 내 고통 보다 누가 더 아픈가   비추어 보라고 선 등대   좋은 꿈꾸며 한숨 푹 자라고 지은 꽃 같은 펜션   사는 것도   7번국도만 같았으면   참 좋겠다   ◀시집 《노량진 극장(2008)》 중▶   쳇GPT: 박산 시인의 시 "7번 국도"는 ..

2024.07.27

노량진 극장

노량진 극장 1 - 1963년 허구한 날 빨간 줄무늬 난닝구셔츠만 입고 다녀서 내 친구 유신이는 별명이 '빨간 난닝구'이고 머리통이 약간 기울어진 경구는 그냥 '짱구'라고 불렀다 화창한 어느 날 노량진역 앞에 극장이 지어졌다 양철 슬래브가 기왓장 보다 더 미끈하게 한옥 지붕 선을 본떠 올렸는데 그 선이 볼수록 크고 멋 있었다 개업 축하 만국기가 빨래줄 같은 긴 줄에 걸려 나풀거리는데 아는 국기라고는 태극기 성조기 일장기 뿐 이었다 샛강 하나 사이에 둔 여의도 비행장에서는 수시로 비행기가 뜨는데 빨간 난닝구는 '노량진 극장 개관 축하 비행' 때문이라고 바락바락 우겨 그럼 내중 뜨던 비행기는 무엇을 경축하려고 떴느냐 핏대 높여 싸웠다 울긋불긋 그려 붙여놓은 극장 간판에는 한문으로 '成春香'이라고 쓰여 있지만..

2024.02.12

당신도

당신도 - 새벽 눈 떠 보고 싶은 이 있다면 당신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꽃잎 질 때 눈물이 흐른다면 당신도 꽃 같은 사람입니다 비 맞는게 싫지 않다면 당신도 비 같은 사람입니다 푸른 하늘이 항시 내 것인 양 한다면 당신도 푸른 하늘 같은 사람입니다 붉은 노을이 주는 빛에 취한다면 당신도 붉은 노을 같은 사람입니다 달 속에 들어 꿈을 꾼다면 당신도 달 같은 사람입니다 * 시집 《노량진 극장(2008)》 중에 添: 아침 시 낭송가 L 문자를 받았습니다. 여고 동창들과 남해 여행 중 저녁 시간에 '당신도'를 낭송했는데 다들 너무 좋다 해서 단톡에 공유했습니다(중략). 오전 벗 해공과 안부 통화 중에 "거...왜... 지난 번 모임에서 K 낭송가가 낭송했던 '당신도'가 어느 시집에 실린 거지?" 드물게도 발표..

2024.01.10

개소리 박박

조지 버너드 쇼 또는 버너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 1950년)로 불려지는 이 아일래드 극작가의 묘비명에는 이리 쓰여져 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인터넷 떠도는 번역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인데, 얼핏 읽으면 인생 후회하는 듯 보이지만 내 번역은 "늘그막에는 제발 하고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는 의미로 읽힌다. (사진 페이스북 발췌) 개소리 박박 - 빌어먹을 세상 결국 나를 버린다고 소주병 양손 틀어쥐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병나발 흔들어 마셔가며 씨발씨발 외쳐 본적이 있는지요 돈 못 벌어들인 제 잘못에 겨워 고분거리는 처자식이 떨어지지 않은 찰거머리..

2023.12.11

개나리꽃 한 줌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개나리꽃 한 줌 - 운동 삼아 걸어 출근하는 날 아파트 뒷길 언덕배기 초등학교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봄이 되어 앉아있다 봄날 소인국에 봄 같은 아이들이 꿈틀댄다 짧은 다리에 끌고 메는 가방이 앙증맞다 웃고 재잘거리는 하얗고 뽀얀 얼굴이 봄빛이다 교문에 서서 인사 나누는 어린 여선생도 봄꽃이다 학교까지 따라 온 젊은 엄마도 봄나물이다 문득 나도 봄풀인가 하다 그 뻔뻔함에 멋쩍어 씩 웃어본다 한 꼬마 봄이 병아리 같은 걸음으로 날 앞질러 쫑쫑 간다 가늘고 여린 예쁘고 귀여운 개나리꽃 한 줌 같다 그러다 문득 ‘네가 내 나이면 나는 없겠지’ 하니 봄이 사라졌다

2023.04.01

당신도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당신도 - 새벽 눈 떠 보고 싶은 이 있다면 당신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꽃잎 질 때 눈물이 흐른다면 당신도 꽃 같은 사람입니다 비 맞는 게 싫지 않다면 당신도 비 같은 사람입니다 푸른 하늘이 항시 내 것 인양 한다면 당신도 푸른 하늘같은 사람입니다 붉은 노을이 주는 빛에 취한다면 당신도 붉은 노을 같은 사람입니다 달 속에 들어 꿈을 꾼다면 당신도 달 같은 사람입니다

2022.12.21

그가 또 만나자 했다

그가 또 만나자 했다 ㅡ 가슴에 詩를 꼭꼭 쟁여 지내며 시 대하듯 얼굴 보자는 고마운 벗이 있다 두물머리 지나 그곳에 산다 모처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만났다 제철 방어 뱃살 회로 수북이 떠서 난 서울장수막걸리 두 병 그는 사랑하는 참이슬 두 병을 깠다 내 시집 《노량진 극장》, 시 속의 그 극장이 어디 있었느냐 물었다 시시콜콜 살아온 얘기 보다는 사는 얘기를 했다 웅얼거리는 투이지만 정감어린 그의 한 마디 한 마디 혹여 놓칠까 귀 쫑긋 세우고 들었다 혼자 일어나 혼자 밥 먹고 산수유로 담군 술 혼자 마시는 밍밍한 얘기 고독을 뭉개며…, 사는데 이골 난 도사 얘기다 담엔 내가 먼저 만나자 해서 詩時한 얘기를 해야지

2022.11.14

잊어버렸다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잊어버렸다 - 우연히 본 내 손등 주름이 쪼글쪼글한 게 영락없는 영감님 손이다 봄 타서 그렇지 하고 잊어버렸다 귀밑 흰 머리카락이 왜 이리 꼬불거리고 일어나는지 그러다 말겠지 하고 잊어버렸다 눈가 다크서클이 기분 나쁘게 조금씩 퍼지면서 세력을 확장해도 거울에 뭐가 끼었나 하고 잊어버렸다 운전하다 뒷좌석 물건을 꺼내려 팔을 돌렸는데 삐끗 하더니 고장이 났다 많이 아프지만 그러다 말겠지 하고는 잊어버렸다 길가다 낯이 아주 익은 사람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헤어졌는데 새삼 ‘저 사람 누구지? 누구더라?’ 기억이 없다 내 친구도 그렇다고 걱정 말라니 잊어 버렸다 오줌발 힘없어 숨 몰아 시간 끌다 질질 나오니 짜증난다 집안 형이 그러는데 다 그런 거라기에 잊어버렸다 아파..

2022.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