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알 11

무위無爲

무위無爲 Ⅰ - 상자 안 등불 하나 켜 놓고 하나둘 셋 주어진 숫자로 하루 세 번 저린 발을 뻗고 딱 세 끼를 챙겨 먹으며 누군가의 이론을 신앙으로 품고 살다 갑자기 찾아온 태풍 같은 무지막지한 그런 것들에 부서진 상자 밖으로 튕겨 나왔다 어둠에 물체들이 손에 잡혔지만 처음엔 온통 두려움뿐이었고 빛을 찾는 이유가 막연했다 굳이 말하자면 무엇엔가의 의존이었다 시간이 물어다 준 여유가 무력한 한숨을 꾸짖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자꾸 움직였고 배가 고플 때마다 먹었다 이전에 경험 못 했던 이를테면 원초적 생명 같은 것들이 심장을 평안케 움직였고 독립된 사고가 상상력을 확대하니 창조 의지가 몰려 왔고 자유와 자율의 사전적 의미의 경계 따위는 무너졌다 이론이다 이념이다 신념이다 다 깨지고 사라졌다 내 편한 내 세상..

2024.01.28

한결같은 이가 좋다

한결같은 이가 좋다 - 순간의 흥취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소 가득 머문 얼굴로 다가오더니 차츰차츰 알아갈수록 사귀는 시간 무기 삼아 언제 그랬냐는 듯 매사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책임은 살살 피할 생각만 하고 제 주장만으로 핏대 세우다가 걸핏하면 혼자 삐치고 혼자 토라지고 궁지에 몰리면 어설픈 핑계로 얼버무리는 어제와 오늘이 너무 다른 이 난 오고 감이 한결같은 이가 좋다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2023.09.30

詩도 그렇긴 하다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2015, 황금알) 》 중에서 詩도 그렇긴 하다 -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스무 해도 훨씬 지난 얘기지만 어찌어찌 머리 얹으려 골프장엘 갔다 처음 밟는 잔디에 잘 맞을 리 있나 그래도 칭찬 일색이다 어쩌다 롱 퍼팅이 소 뒷걸음에 똥 밟은 격으로 들어갔다 타고난 골프 천재다 - 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스윙 폼이 타고났다 - 열심히 치라는 얘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러면 그렇지 내 뛰어난 운동 신경이 어디 가나 세 살 바보가 되어 우쭐했다 내게 시를 보여주는 이 몇 있다 몇 개의 단어 쓰임이 상쾌하고 문장 몇이 조화롭다 아니 어찌 이런 멋진 표현을 - 읽는 맛이 너무 좋다 - 시적 소질이 풍부하다 - 시도 그렇긴 하다 공치는 일과 매한가지로 누군가 칭찬해주고 용기를 주어야..

2023.07.05

겨울 숲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겨울 숲 - 바람은 어둠 따윈 개의치 않는다 볼때기 시리게 쌩쌩 때리는데 숲이 “잘 있었냐?” 묻는다 그 길고 추운 고독 알 것도 같고 그냥 휙 지나치기 미안해 그래 너는 어때 하고는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는데 황색 점퍼 입은 노인이 지팡이 짚고 낙엽 부스러기를 발끝에 질질 끌고 지나간다 햇빛은 어두운 숲을 포기하지 않고 하늘 향해 벌거벗은 나무 꼭대기에서 소리 없이 웃으며 서성인다 빨간 바지 파란 파커가 어울리는 여인이 검은 선글라스로 어둠을 더하면서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스쳐 지나간다 숲은 저 여인하고도 말하고 싶어 나무 몇 그루를 흔든다 숲을 빠져나왔지만 노인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다 돌아본 숲이 표정 없이 잘 가라 손짓이다 바람은 여전히 차다

2023.01.12

호라티우스를 꿈꾸며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호라티우스를 꿈꾸며 - 하루하루를 사는 게 다 전쟁이지 밥벌이 핑계로 내던져진 육신 미끈한 자동차 붉은 입술과 하이힐이 어울리는 애인 건성으로 웃어주는 甲들 이 전쟁에선 무조건 살아내야 한다 생존을 위해 몰래 품고 있던 칼을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해 뺐다 벤츠 트렁크에 있던 명품 골프채가 때론 마구잡이로 부수는 도구로 변모했고 기세등등하던 甲이 불쌍한 乙 신세가 되었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 역시 부지기수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칼 소리가 익숙해지고 시간을 충실히 버티는 중 전쟁이 잠시 멈췄다 어깨 부서지고 머리 깨져 터져 나온 회복 불가할 상처가 쓰리고 아팠는데 갑자기 하늘이 행운을 내려주었다 나의 부자 친구 마이케나스! 그가 준 대지에 큰 집을 짓고..

2022.11.17

도정(陶情)

박산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황금알 2015》 도정(陶情) - “잘 지내시지?” 보고파 목소리라도 들으려 통화하고 싶지만 사는 게 번거로운 세상 행여 그리움도 사치라 할까 어찌 내 심사心事 같겠는가 넌지시 카톡으로 “?” 보냈더니 두 장의 풍경 사진과 세 장의 인물 사진에 각각의 사연을 꼼꼼히 보태 구구절절 보내온 회신 '당신도 내가 보고팠구나!' 울컥 고마운 마음으로 또 보고 또 읽다가 마치 마주 보고 있는 듯 새록새록 솟는 정을 빚었다 * 陶情: 陶情且小詩 - 정을 빚어 다시금 시를 짓는다 남극관(1689-1714)의 시 雜題 중

2022.07.23

해빙기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해빙기 - 검고 붉게 성긴 딱지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피 흘리던 통증의 기억 여전히 어제의 일이지만 새살이 차가운 얼음에서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고맙다 찢어지고 터졌던 원인을 지금 다시 분석한다는 건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 같은 비즈니스적인 것 구름 일고 바람 불고 눈비 내리시는 일에 겨우 티끌 하나 죽도록 미워하고 울다가도 다시 다가온 사랑 한 방울 꽁꽁 얼었던 빙하의 바다 향한 눈물 같은 거 녹아 툭툭 떨어지는 처마 끝의 고드름 같은 거 그럼 됐다

2022.07.05

밑천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황금알 2020》 밑천 - 그간 입고 먹고 다닌 세월이 얼마인데 정작 찌울 건 안 찌우고 정말 지닐 건 생각 없이 버리다가 순간의 쾌락에 물든 게으름이 규칙을 까맣게 잊은 채 흐물떡거리는데 땟국에 절어 나달나달 해진 옷자락들이 하잘것없이 식어버린 속내만 긁어댄다 모처럼 큰 호흡 자위 아닌 자위로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짧은 밑천 다 드러났는데도 헛기침에 모른 척 점잔이라도 빼 볼 양으로 에헴! 에헴! 지나가는 강아지가 킥킥 배부른 참새도 조잘조잘

2022.01.27

그대가 견지하는 침묵의 의미는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그대가 견지하는 침묵의 의미는 판단의 유보이고 관망하는 중인가 행여 그대의 삶이 지친 여행 끝에서도 찾지 못하는 절망의 길처럼 지독한 고독 끝에 찾아오는 춥고 시린 배고픔이 침묵 구도의 방편과 도피가 아니기를 돌이켜 그대가 그간 뱉어낸 언어들을 기억해보면 경계를 넘나드는 정돈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신사다움과 확고한 신념으로 소나기 퍼붓듯 쏟아 냈던 벅찬 열정들 그것들이 지금 내 기억엔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그대의 침묵이 가슴 저리게 안타까워 잠시의 휴식을 위한 위장이려니 생각하겠네 한두 해 겪어본 것도 아니니 제발 단풍과 곧 떨어질 낙엽을 핑계 삼지 말고 추운 겨울도 너무 두려워 마시게나 나도 새봄까지는 그대 따라 침묵하고 싶지만 인내로 가장하여 나를..

2021.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