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지은 시 23

편견Prejudice

편견Prejudice ㅡ 먼저 고백하건데 이종교배에 대한유전자적 현상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나에 더한 둘이 다섯이 되고여섯이 되고 열이 되고백이 되는 세상에서지금은 가설假說을 믿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나이 예순 넘은 지 좀 됐습니다 저기 저 사람 말입니다보기 싫은 어떤 얼굴을 닮아볼 것 없다 말도 안 섞고 살다가이 역시 가설을 신뢰하기 시작하면서가만가만 다가가는 중입니다 물기 빠진 단풍은 이미 죽었습니다세상에 향기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그렇지만…불사르며 내는 흰 연기는불멸의 내음입니다 둥근 지구에서는그 쪽 사람들은 없습니다 뼛속 고정관념을 무시하고변신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지요이리 다짐하고 있는 중입니다  ㅡ it's never too late to give up our prejudices(H. Davis..

2024.04.27

무위 3

무위 3 - 곧장 앞으로만 가라고 배워 살았는데 살다 보면 그게 어찌 그리 쉬운 일이던가 휘고 꺾이어 부러지기 일보 전에야 겨우 목숨 건진 게 몇 번이었나 하늘 계신 울 아부지도 그랬겠지 깔린 양탄자 밟고 사는 인생 몇 되나 목구멍 꿀꺽꿀꺽 타고 넘는 막걸리같이 들어가 타고 흐르고 내려가다 보면 오줌 되고 똥 되고 뭐…다 그러는 거지 이쪽 길도 저쪽 길도 살피다가 오던 길 뒤도 한 번 돌아보고 힘닿으면 닿는 길을 가야지 비가 오시려나 눈이 오시려나 어여 오시길! * 시집 《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4.03.19

해빙기

해빙기 - 검고 붉게 성긴 딱지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피 흘리던 통증의 기억 여전히 어제의 일이지만 새살이 차가운 얼음에서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고맙다 찢어지고 터졌던 원인을 지금 다시 분석한다는 건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 같은 비즈니스적인 것 구름 일고 바람 불고 눈비 내리시는 일에 겨우 티끌 하나 죽도록 미워하고 울다가도 다시 다가온 사랑 한 방울 꽁꽁 얼었던 빙하의 바다 향한 눈물 같은 거 녹아 툭툭 떨어지는 처마 끝의 고드름 같은 거 그럼 됐다 *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 중

2024.02.29

불목하니

불목하니 - 태어나길 머슴 팔자인 줄 모르고 고운 입성에 에헴 몇 번 했던 게 무슨 큰일이었다고 누군가 도끼질로 힘들게 패서 때 주는 장작불에 콧노래로 군불이나 쬐고 누군가 가마솥 쌀 일어 정성으로 지은 밥을 제 입 잘나 먹는 줄만 알고는 누군가에게는 더럽다 치워라 비질을 당연시 명령하고 살다가 알량하게 가진 밑천 여기저기로 다 새나가고 몽땅 털려서는 속내 발랑 까발려져 결국 덜렁 불알 두 쪽 남았는데도 못 살겠다 늘어놓는 신세타령에 앓는 곡소리 웃기는 소리 마라 남들 비웃는 소리가 귀로 들어 머리를 찧는다 뒤늦게 찾아온 머슴의 회한 늦었지만 어쩌겠나! 그나마 깨달았으니 다행이지 못난 자신 위한 속죄의 절집 하나 가슴에 지어 도끼질도 해야지 밥도 지어야지 비질도 해야지 비나이다 비나이다 불목하니 되어야지..

2024.02.06

겨울 숲

겨울 숲 - 바람은 어둠 따윈 개의치 않는다 볼때기 시리게 쌩쌩 때리는데 숲이 “잘 있었냐?” 묻는다 그 길고 추운 고독 알 것도 같고 그냥 휙 지나치기 미안해 그래 너는 어때 하고는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는데 황색 점퍼 입은 노인이 지팡이 짚고 낙엽 부스러기를 발끝에 질질 끌고 지나간다 햇빛은 어두운 숲을 포기하지 않고 하늘 향해 벌거벗은 나무 꼭대기에서 소리 없이 웃으며 서성인다 빨간 바지 파란 파커가 어울리는 여인이 검은 선글라스로 어둠을 더하면서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스쳐 지나간다 숲은 저 여인하고도 말하고 싶어 나무 몇 그루를 흔든다 숲을 빠져나왔지만 노인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다 돌아본 숲이 표정 없이 잘 가라 손짓이다 바람은 여전히 차다 Postscript: 빨간 바지에 파란 파카가 어..

2024.01.07

한결같은 이가 좋다

한결같은 이가 좋다 - 순간의 흥취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소 가득 머문 얼굴로 다가오더니 차츰차츰 알아갈수록 사귀는 시간 무기 삼아 언제 그랬냐는 듯 매사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책임은 살살 피할 생각만 하고 제 주장만으로 핏대 세우다가 걸핏하면 혼자 삐치고 혼자 토라지고 궁지에 몰리면 어설픈 핑계로 얼버무리는 어제와 오늘이 너무 다른 이 난 오고 감이 한결같은 이가 좋다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2023.09.30

움직이는 그림

움직이는 그림 - 가뭇없던 그 그림이 다시 나타난 건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노랑, 파랑, 딱 집어 정확히 말하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면 더 당황스러워져서 표현하기 어려운 색깔 푸른빛에 잿빛 섞인 바탕이라고나 할까 색 바랜 똥색 테두리의 액자를 뉘어 놓고 쌓인 먼지를 입으로 풀풀 불어 내고는 외눈 박힌 도깨비 손에 든 빗자루로 탁탁 털어냈다 대청마루 섬돌, 마당 한 귀퉁이에 절구통이 놓여있다 녹색 페인트 듬성듬성 벗겨진 대문에 붙어있는 담장 쇠창살을 타고 긴 얼굴을 가장 슬프게 한 삐쩍 마른 수세미 하나가 손대면 바스락 부서질 것 같은 잎사귀 몇 장에 얽히어 걸려있다 전봇대 거미줄 같이 엉킨 전깃줄에서 용케 뻗어 나온 한 줄에 흰 배를 드러낸 제비 한 마리가 앉아있다 아버지 같은 누군가가 보일 것 같은데..

2023.08.08

고백

고백 - 간절한 바람으로 치성드리는 일에도 주저 거리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용감했던 순간보다 비겁했던 순간이 많았습니다 종鐘의 울림 정도는 그저 일상의 익숙한 음악으로 들렸고 신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종교를 신봉한 적도 없습니다 돈에는 치사하리만큼 처절했고 여자에는 유치하리만큼 내숭을 떨었지요 얼굴이 화끈거리게 더 뻔뻔했던 건 소소한 것까지 챙기는 무한적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좋은 무엇을 가지고 내게 누군가 올 것이라는 가당찮은 기대감입니다 목적에 이르지 못함이 불러온 불만이 컸지요 겸손이나 겸허 따위의 고상한 언어들을 애써 강에 버리면서 살아온 위선적 세월이 얼마인지 모릅니다만 지금은 순정이나 순수 이런 단순한 단어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내 고향 한강 철교 아래서 발가벗고 물장구..

2023.07.29

詩의 마케팅學 개론

詩의 마케팅學 개론 - 시집 팔아 돈 벌 생각이면 한쪽을 극렬極熱하면 된다 좌左든 우右든 교회를 다니든 성당을 가든 절집을 찾든 간에 그 집에 열렬 악대樂隊를 시詩로 만드는 거다 트럼본시 호른시 클라리넷시 피콜로시 작은북시 큰북시 등을 조합하여 쾅쾅 울려대며 소리도 크게 지르고 음에 자주 악센트를 자주 집어넣고는 시인도 어릿광대춤을 덩실덩실 추다 보면 호른시 한 구절이 큰북시 한 구절이 패스트푸드의 중독성 강한 맛처럼 우상의 나팔 소리로 빵빵 울려 퍼진다 이게 뭐지? 궁금함을 못 참는 시대의 조급증이 SNS 스피커로 증폭되다가 급기야 힙합의 중얼거림으로 연속극 대사 한 줄로 아이돌스타의 인스타그램 한 줄 낙서로 어떤 시집이지? 시인이 누구지? 시집이 팔리기 시작했다 시의 마케팅이 성공했다 시인의 고뇌 따..

2023.06.11

키오스크 소고

키오스크 소고 ㅡ 버거킹 와퍼 하나에 감자튀김을 터치 주문 완료했는데 갑자기 핫초코 하나 더 추가하고 싶었다 이리 터치 저리 터치... 쉽지 않다 뒤에 줄만 안 서 있어도 차분하게 해 보겠건만... 결국 뒷줄 젊은 친구에게 Help Me! 했다 어찌나 빠르고 쉽게 추가하는지 진흠모 모꼬지 마니또 선물 써치로 어제 갔던 다이소에서 페이 QR을 찍는대도, 하긴 했지만 솔직히 어벌벌 했다 지인 몇 분 초대로 간, 맛집으로 소문난 생선구이집에서는 AI가 밥상을 들고 왔다, 돌아가는 터치를 찾느라 일흔 언저리 네 사람이 또 어벌벌 떨다 오래 걸려 AI를 마냥 기다리게 했다 쏘리 AI야! 일찍이 영타를 업무상 상용했고 또래보다 컴퓨터 얼리 어댑터임에도 이 모양새다 나이 탓 말고 즐겁게 자꾸 부닥치자 키오스크에 감사..

나의 이야기 2023.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