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영감태기 19

무위도無爲島

무위도無爲島 -  긁힌 생채기 자국을 지우기 위해 굳이 애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세월이 데려온 구름은 삼라만상 변화무쌍으로 지우고 만들고 부수고 떠 있다 떨어지길 반복하는데 바닷가 한가운데 있건 깊은 산속 오두막에 있건 서울 한복판 빌딩에 있건 둥둥 떠 있긴 마찬가지다  원래 아버지 땅에 있던 나는 어머니 섬에 놓인 연륙교였다  아문 상처는 바위가 되어가고 거기엔 촉촉이 물이 고일 것이고 물살 헤치고 오롯이 떠오르는 날 뭍의 누군가는 또 연륙교를 놓을 것이다  구름의 행위는 여전하겠지만 …‥ 그러니 아파하지 마시라  * 시집 《가엾은 영감태기》 중

2025.04.06

봄바람

봄바람 -  동백이 붉어도 나 보기엔 마냥 수줍게만 보입니다   아직 찬바람은 창연하게 걸린 풍경 소리를 나지막이 부르고 있습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길섶에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뭉쳤다 흩어지며 털을 부빕니다   마른 잣나무에 물기 오르니 다람쥐 눈망울은 분주해지고 바람은 또 기웃하며 어정거립니다   비탈 데크 계단을 오르며 햇빛에 비친 그림자를 앞세우다 문득 당신 생각이 납니다   과거에도 있었을 나무에 기대 미래에도 있을 광경을 내려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로 겹쳐집니다   뭉게구름 한 뭉치가 잠시 해를 가리고 있지만 으레 그랬던 일처럼 무심합니다   지금 무얼 하고 계신가요 나는 그대 그리움을 만들고 있는데 바람은 또 귀를 간질입니다   희망이 절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꿈..

2025.03.14

가엾은 영감태기

가엾은 영감태기 -  조막만한 몸도 덩치라고 어깨 벌려 걷는 팔자걸음이나마 제멋에 취하고 내가 왕년에로 시작하면… . 유도했다 태권도 유단자다 산에 가면 날다람쥐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간에 이 허세 달고 사는 기분도 괜찮은데 예순 훌쩍 넘어 그가 아쉬운 건 딱 하나 외롭다는 거다  의리 상실하고 5년 전 먼저 소풍 떠난 마누라가 밉다 하나 있는 딸년을 작년에 여의고 나니 집에서 밥해 먹는 일도 궁상맞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문화센터 스포츠댄스 배우러 갔다가 반년 만에 교양 만점 배 여사를 만났다 붉고 짙게 바르는 화장이 아니어서 좋고 꽉 끼는 바지 대신 치마를 입으니 보기에 여유로워 좋고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함께 마셔서 좋고 톡 까놓고 통성명은 안 했지만 얼핏 맞춰 보니 나보다 한 살 어려 또래인 ..

2025.02.11

나 때는… (여행 이야기 포 12)

나 때는…  -업무적이긴 하였지만 비교적 외국을 많이 다니며 살았다.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랜 이즘은 그냥 여행을 꿈꾸는 정도로 만족하며 사는 중이다. 그럼에도 기회가 되면 국내외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다.국내 여행이야 그렇다손 치고, 해외여행 그중에서도 장소가 먼 유럽 등지는 긴 비행시간뿐 아니라 늘그막 체력 배려 안락한 숙소 등 경비도 만만찮게 들어간다.지난 포루투갈 살이 시, 많지는 않았지만, 간혹 간혹 만나 본 우리 젊은 세대들의 여행 행태를 간접 들여다보면서 새삼 우리가 부자 나라라는 실감을 또 했다.그 행태, 여기서 내가 표현한 형태가 아닌 ‘행태’라 함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마땅 보다는 못마땅함에 이르는 부정적 표현임을 미리 언급한다.자, 그 행태를 말하자면,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살아 온 ..

여행 이야기 2025.02.05

허무의 그림자

=허무의 그림자 스무 해 넘겨 무위(無爲)를 지향했더니허무의 그림자 더께가 끼어들어사는 게 지루해졌습니다 변화가 절실했습니다 자주 안 먹던두툼한 패티가 든 햄버거를 아구아구 씹어도 보고장안에서 소문난 화덕 피자에 맥주를 마셔도생의 혁명을 시도했던 열정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 비웠다 더 이상은 없다 그럼에도 무언가 자꾸 채워지는 낯선 느낌입니다 작은 서재에는 책들이 쌓였습니다책갈피 여기저기에 시(詩)들이 숨어 있고이야기가 길어 읽기 어려워진 소설들도 신음 중이고수필은 기척도 없습니다저만치 괴테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소월은 낡아 헤질 지경입니다천상병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갑자기 매운 게 당깁니다무교동 낙지볶음을 먹을까청진동 선지해장국에 다진 청양고추를 듬뿍 뿌려 ..

2025.01.19

회암사지 백자 동자상

회암사지 백자 동자상 ㅡ 양주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아주 작은 백자 동자상을 만났습니다 얼핏 손오공 닮은 원숭이 캐릭터 같고 아기 사랑하는 부처님의 재롱둥이 같은 깎은 머리에 선한 눈 예쁜 코 작은 입술에 앙증맞은 장삼을 입고 천상을 우러르는 과거 어떤 소리를 듣고 보았을까요 지금은 어떤 빛을 저리 찾고 있을까요 사라진 절터 오랜 흙더미 속에서도 그 인고의 세월 견뎌내고 어깨 한 편이 떨어지고 얼굴에 구멍이 나고 온몸에 실금이 나 있어도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저 표정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 절대 무명은 아닙니다 필시 광명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아직도 두 손 모아 빌 것 많은 이 사바세계에서  회암사에 가보세요 -   맥이 빠지고 의욕이 사라진 날엔 양주 회암사에 가보세요   화재로 사라졌던 절이지만 돌덩이 하..

2025.01.08

상생

=상생 두 발로 걷는 사람이우주의 시간을 한 발로 걷어찼다 땅 딛고 선 남은 한 발이머뭇거리다가 생각을 불러왔다 생각이 부풀기 시작했다빨갛고 파랗고 노랗고불뚝불뚝 크고 작고혼을 부르는 샤먼의 북소리로다시 모아진 두 발이전에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엎어졌던 시간이가만가만 다가와 두 발을 감쌌다뿌리가 있다무형의 잔뿌리가 얼키설키 뭉쳐 있다 각각의 생각으로 꿈틀대며 뭐라 말하는불로도 결코 태워지지 않는 것들이미워해야 했던 건언제나 공평했던 시간이 아니라순간순간 성급했던 발길질이었다 아니라 해도 그건 오만이었다 두 발을 주무르고 있는 중이다    * 시집 《가엾은 영감태기 (예서의시)》 중

2025.01.01

인사동 시낭송 송년 모꼬지 진흠모 '278‘

【인사동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 '278‘】       12월 27일 6시 30분 마지막 금요일 Dress Code: 정장  종로구인사동길52번지 인사14길詩/歌/演(02)7206264쥔장:김영희 01028203090/ 이춘우010777315791호선종각역→안국동방향700m3호선안국역→종로방향400m  * 낭송 예정자:   김미희 김효수 노희정 유재호 신순희 김중열 조철암 한옥례 안기풍 선경님 권혁국 김명희 김경영 박산 이생진    【인사동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 '277’ 스케치】(11월 29일 6시 30분 마지막 금요일)    1. 목마와 숙녀: 낭송 김미희/시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

2024.12.21

노인 냄새

== 노인 냄새   야트막한 산에 둘러싸이고   항시 흐르는 개울에는 물고기가 많아   철새들이 아예 텃새로 눌러앉은   환경 만족도 만점인 작은 신도시 내 아파트에서  가까운 전철역을 가려면  버스로 몇 정거장을 가야 합니다   도중에는  실버아파트 단지가 두 군데 있어서  앞자리는 가급적 사양합니다   오전 9시 조금 넘은 이른 시간임에도  걸음이 불편하고   세월의 낙서가 얼굴 깊게 새겨진 분들이  여기저기 빈자리를 채웁니다  전철역 버스정류장 내려 걷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수다스런 40대 여인들이   내 어깨를 휙 밀치고 앞서가며   코를 틀어막는 시늉으로 하는 말이   “어휴 버스, 노인 냄새!”  순간, 쫓아가 뒤통수를 한 대 퍽! 치면서  “니들은 안 늙냐?”  한 마디 쏘아주고 싶었습니다 ..

2024.11.17

1/n

= 1/n   내가 먹은 만큼 나눠내자는데  무슨 불만이 있을까만  사람 사는 세상  어찌 삐죽 내 몫만 내밀까  형편 따라  2/n도  3/n도  4/n도….   내가 좋아하는 영어 한 마디  ‘Let Me Buy a Round for Everyone’  -내가 여기 거 다 쏠께!-  가끔은 이래야 세상사는 맛 나는 거 아닌지   서넛 만나 막걸리 한 사발 하는데  1/n은 무신 얼어 죽을….    * 시집 《가엾은 영감태기(2024, 예서의 시)》 중

2024.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