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박산 2025. 3. 14. 08:16

화엄사 홍매

 

봄바람 -

 

 

동백이 붉어도

나 보기엔

마냥 수줍게만 보입니다

 

 

아직 찬바람은

창연하게 걸린 풍경 소리를

나지막이 부르고 있습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길섶에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뭉쳤다 흩어지며 털을 부빕니다

 

 

마른 잣나무에 물기 오르니

다람쥐 눈망울은 분주해지고

바람은 또 기웃하며 어정거립니다

 

 

비탈 데크 계단을 오르며

햇빛에 비친 그림자를 앞세우다

문득 당신 생각이 납니다

 

 

과거에도 있었을 나무에 기대

미래에도 있을 광경을 내려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로 겹쳐집니다

 

 

뭉게구름 한 뭉치가

잠시 해를 가리고 있지만

으레 그랬던 일처럼 무심합니다

 

 

지금 무얼 하고 계신가요

나는 그대 그리움을 만들고 있는데

바람은 또 귀를 간질입니다

 

 

희망이 절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꿈을 꾸었지요

까마득한 얘기는 이미 잊혀졌습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진종일 서서 그대만 생각하고 싶습니다

 

 

구름이 저만치 떠나가고 있습니다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 바람 탓인 줄은 압니다

 

 

그대도 아시겠지요

우리들의 길었던 입술 호흡조차

바람의 언어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소나무도 사실 늘 푸르지는 않습니다

속내 곪아 벗겨져 때때로 떨어집니다

바람이 달래가며 사는 셈이지요

 

 

그대여

바람이 자연의 언어이듯

그 바람에 들어 살고 싶습니다

 

 

그 바람 중에

봄바람이련

봄바람이련

 

 

 

* 시집 《가엾은 영감태기》 중

 

봄날 밀라노 라 스칼라 좌 오페라극장 앞에서(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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