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10

배신

배신 ㅡ 시인이 섬에 갔다 지난 번 발자국을 찾다가 파도가 한 일 깨닫고는 낮은 모래 언덕에 사는 메꽃에게 그간의 안부 물었더니 나도 보고 싶었다 와락 반기는데 키 작은 순비기나무는 바람 불러 크게 몸을 흔들고 여러 해 산 통보리사초는 나잇값 하느라 웃고만 있었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 . . 그리움은 땅 속에 묻혀도 보인다구요 대나무로 보이고 메꽃으로 보이고 순비기나무로 보이고 통보리사초로 보이다가 금방 모래밭에 파묻힌다구요 시인이 세월의 발로 쓴 이 시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시가 功을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지금 이 섬에는 연예인 몇이 밥 먹고 떠들다 간 그 발자국을 찾는 이들로 넘친다 갯메꽃 순비기나무 통보리사초는 여전히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22.03.06

거문도에서 날아온 시

박산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2015 황금알》 「거문도에서 날아온 시」 '등대의 말은 시다' - 이생진 오른쪽엔 하얀 등대 왼쪽엔 빨간 등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멀쩡한 날 하루 종일 마주 서서 말없이 지내기란 답답하겠다 오른쪽엔 하얀 등대 왼쪽엔 빨간 등대 흰 등대에선 흰 손수건이 나오고 빨간 등대에선 빨간 손수건이 나올 것 같다 오늘은 그들 대신에 내가 서 있고 싶다 여의도 어느 빌딩 속에 시가 날아들었다 D증권 초보 애널리스트 스물여덟 먹은 김수영 양은 한강 공원이 내려 보이는 19층 화장실에 앉아 이생진의 시집 ‘거문도’를 읽다가 물 내리는 소리가 파도 인양 하였다 여의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속의 거문도다 63빌딩 앞 흰 등대에선 흰 휴지가 나오고 밤섬..

2021.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