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글 7

서울 사는 범부凡夫

서울 사는 범부凡夫 - 하는 일은 별 볼일 없어도그럭저럭 돈이 있으니 갈 곳이 있다골프장 그리고 룸살롱이다지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들에 지치면 지루하다 고독을 모르니 더 지루하다 돈이 없어야 진한 고독을 알 수 있다 청산靑山이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 즈음이면풍족하여 술에 망가진 몸뚱이가 말을 안 듣는다 이 때 서울 사는 범부 유목遊牧의 경계를 넘어 은둔하려한다  나오는 한숨에 이제야 진한 고독을 마시고 싶다 청산에 가고 싶다 홀로 있어 보려나 꽃 이름 몇 개라도 알려나   *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우리글 2011)》 중

2024.12.10

옴니버스 스토리Omnibus Story

옴니버스 스토리Omnibus Story -  빌딩 숲에서 목구멍 넘어가는 자판기 커피 맛이새삼스러이 정나미 뚝 떨어지는 순간 여길 빨리 떠나고 싶다 네 명이 둘러앉아 소주에 삼겹살을 먹는데상추 물기 털어내며 씨팔조팔 어수선한 얘기 뻥 튀기듯 노가리만 푸는데 갑자기 고독하고 싶어 나왔다  어슴푸레한 저녁 높지 않은 산기슭 작은 바위 그 언저리 털썩 주저앉아 내려다보이는 도심 반짝거리는 불꽃들에이유 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조신했던 여자의 변덕이 죽 끓을 때참고 또 참다가 인내의 한계는 여기다 하고절교를 선언했다  눈 내리는 날 겨우 한두 사람 내려놓고 떠나는 간이역 기차 뒷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 그냥 역으로 갔다     ◎ 시집 《노량진 극장(2008,우리글)》 중에서

2024.12.03

당신도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당신도 - 새벽 눈 떠 보고 싶은 이 있다면 당신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꽃잎 질 때 눈물이 흐른다면 당신도 꽃 같은 사람입니다 비 맞는 게 싫지 않다면 당신도 비 같은 사람입니다 푸른 하늘이 항시 내 것 인양 한다면 당신도 푸른 하늘같은 사람입니다 붉은 노을이 주는 빛에 취한다면 당신도 붉은 노을 같은 사람입니다 달 속에 들어 꿈을 꾼다면 당신도 달 같은 사람입니다

2022.12.21

인사동仁寺洞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인사동仁寺洞 말言이야 조선 시대를 팔아먹고 살지만 조선 시대 그림자는 죽은 지 이미 오래다 시인 묵객들이 아직은 기웃하지만 육천 원 하는 차 한 잔이 버겁다 거죽만 흉내 낸 옛날이야기가 한글 간판 속 가득한 듯 하지만 알고 보면 다 버터 칠해진 냄새라 맡기 역겹다 기와집 골목길 몇 개가 엉켜있는 사이사이 연기 없는 옛날 굴뚝은 화난 듯 봐 달라 기대어 서 있지만 누구 하나 아는 척 하는 이 없다 커피 집, 와인하우스, 24시 편의점, 옷가게 그리고 먹는 집 + 또 마시는 집 자정을 넘긴 네온사인 꺼진 이른 새벽 거리 가로등도 죽은 골목 사람 흉내 낸 어둠도 술 취한 척 질척거린다 이 때다 싶은 영혼 서린 소설가는 어둠 속 거리에 무릎 꿇어 글을 쓰고 소음이 싫었..

2021.11.25

7번 국도

시집 《노량진 극장 2008, 우리글≫ 「7번 국도」 부산까지 안 내려가도 좋다 함경북도 온성까지 안 올라가도 좋다 그냥 동해바다 속초 강릉 주문진 삼척 울진 그 근방 은모래 백사장 소나무 숲 굽이굽이 품은 도로 수평선 붙은 하늘 항시 열려 있고 그 하늘 아래 산맥이 바다 향한 새벽 기지개 던지는 길 밉고 하기 싫은 것 여기 모두 던지라고 넉넉한 바다 골치 아픈 생각 이젠 그만 하라고 일직一直이룬 수평선 지금의 내 고통 보다 누가 더 아픈가 비추어 보라고 선 등대 좋은 꿈꾸며 한숨 푹 자라고 지은 꽃 같은 펜션 사는 것도 7번 국도만 같았으면 참 좋겠다

202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