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인사동仁寺洞
말言이야 조선 시대를 팔아먹고 살지만
조선 시대 그림자는 죽은 지 이미 오래다
시인 묵객들이 아직은 기웃하지만
육천 원 하는 차 한 잔이 버겁다
거죽만 흉내 낸 옛날이야기가
한글 간판 속 가득한 듯 하지만
알고 보면 다 버터 칠해진 냄새라 맡기 역겹다
기와집 골목길 몇 개가 엉켜있는 사이사이
연기 없는 옛날 굴뚝은
화난 듯 봐 달라 기대어 서 있지만
누구 하나 아는 척 하는 이 없다
커피 집, 와인하우스, 24시 편의점, 옷가게
그리고 먹는 집 + 또 마시는 집
자정을 넘긴 네온사인 꺼진 이른 새벽
거리 가로등도 죽은 골목
사람 흉내 낸 어둠도 술 취한 척 질척거린다
이 때다 싶은 영혼 서린 소설가는
어둠 속 거리에 무릎 꿇어 글을 쓰고
소음이 싫었던 시인은
더 이상 나올 것 없는 빈 소주병 빨며 펜을 찾는다
인사동이나 명동이나 다를 게 없다
단지 어둠에 취했을 때 정신 잃었던 보헤미안들이
인사동에서는 유독 정신을 차린다는 점이다
사라졌던 조선의 인사동 영혼이
스멀스멀 어둠을 틈타
제대로 쪽이라도 한 번 쓰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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