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현 화가 15

무직無職의 세월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무직無職의 세월 - 그 해 겨울 참 추웠다 눈 뜨고 일어나는 아침이 시렸다 갈 곳 없는 가장은 모든 게 비굴해졌다 양치질조차도 힘이 없으니 입안 거품에 신이 없고 세수소리 조차도 물방울이 잠잠하다 86년 그 해 겨울 바람이 몹시 불던 날 구겨진 자존심에 포장마차 소주가 다섯 병째 위장에 채워졌다 이상하리만큼 술은 더 이상 취하지 않았다 새로운 기운이 허허롭게 내 허파를 간지럼 태울 때 비로소 찡그린 얼굴에 알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어둑어둑 하늘은 그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뭉게뭉게 구름을 품고 있었고 숨어있는 달 모양으로 움츠러든 내 목은 스승인양 그 구름을 따르고 있었다 스무 해도 더 지난 이 겨울은 한 병의 소주에도 취하고 떠있는 구름에도 관심이 없다 잊혀..

2022.12.12

인사동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 252

【인사동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 252】 2022년 10월 28일 7시(매달 마지막 금요일) 종로구 인사동길52번지 인사14길 詩/歌/演(02) 720 6264 쥔장:김영희010 2820 3090 /이춘우010 7773 1579 1호선 종각역→안국동 방향700m 3호선 안국역→종로 방향400m 「생자 사랑」 - 양숙 사전을 펼치다 우연히 ‘생’에 눈이 갔다 안 그래도 요즘 무더위에 죽을 맛인데 기차도 아니면서 마구 내달리며 쌩 쌩 쌩 온 천지에 더위를 뿌린다 쌩떼 쌩고생 쌩매장 쌩이별 쌩지옥 에구 그만 그만! 편안한 것 좀 없나? 휘리릭 넘기다 좋아 딱! 너야 ‘생’ 오늘 저녁 생자랑 한잔 어때? 주류당 넌 ㅇㅇ생 비주류당 난 생ㅇㅇ 순순히 나와라 생자 오바! 생명 생각 생기 생산 생태 생화 生字씨 사랑해..

2022.10.22

어머니 그리고 시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어머니 그리고 시 - 단풍 든 가을 치매 진단 받은 어머니 병원 모시고 간다 병원 진찰하고 약 탄 후 “뭐 잡수고 싶으세요” “갈비탕” 자주 가시는 단골 갈비탕 집 질리지도 않으신 모양이다 가을 구경시켜 드리려 가까운 숲을 찾았다 느린 걸음 산책하시는 어머니 난 벤치에 앉아 시첩을 꺼내 뭔가 끼적거렸다 어느새 다가오신 어머니 “시 쓰냐?” “네 그냥 요” “시가 재미있냐?” “재미는요 뭐 그냥 쓰는 거지요, 옛날에요..... 서양사람인데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짓는 일이고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하이데커’ “그래?” “이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래 시 쓰는데 무슨 죄가 있겠니” 성질 급한 단풍 하나 어머니 ..

2022.03.07

끊기 힘든 버릇

끊기 힘든 버릇 ㅡ 2009 갤럭시 8GB부터 갤 2,5에 이어 현재 갤10이니 스마트폰 1세대다 만병통치 약 같이 엔간한 건 다 스마트폰이다 업무적 메일 체크부터 작은 살림살이 입출금 내역에 송금까지 어디 그 뿐인가 글쓰기도 거의 스마트폰에 의존하고 약속·스케줄은 물론이요 하루만 '박산의 잡문 소통'을 걸러도 손가락에 가시가 돋듯 무슨 일 있으세요 어디 아프신가 진솔한 문자로 물어 오는 한 마흔 분 남짓한 영혼을 나누는 지인들과의 소통 일간지 문화면 살펴보기에 메이저리그 각 팀 스코아 체크하여 승리투수 홈런타자 등등을 확인하기 넓고 넓어 끝이 안 보이는 유튜브 바다에서 한나절을 파도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헤엄치며 노는 것도 모자라 잠 잘 때도 이어폰으로 시와 소설을 들으며 잔다 마약 보다 끊기 힘든..

2021.10.11

젓가락질은 인격이다

☆ '舞姬' Drawn by 조남현 ☆ 젓가락질은 인격이다 ㅡ 무언가를 국내외에 팔기 위한 직업을 평생했던 사람으로서 내국인은 물론 동ㆍ서양 사람들과도 식사나 술자리를 자주 해 오고 살았다. 일전에 우리 회사 윤 사장과 지방 도시에 위치한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내 또래의 A 사장을 만나러 갔다. 나 역시 구면인 분이었는데 점심으로 그 지방에서는 꽤 알아주는 시설 좋은 고깃집에서 갈비탕을 먹었다. 그런데 마주 앉은 A 사장의 젓가락질을 보고는 내심 당황했다. 엄지 검지 중지 사이로 젓가락을 가볍게 잡고 반찬을 집는 게 상식인데 젓가락 두 개를 움켜쥐고 숫가락을 덧대어 갈빗살을 벗겨 내는 모습에, 보는 내가 아슬아슬 불안해질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식사 중에 내가 묻는 말 이외에는 일체의 대화가 없었다. 후..

나의 이야기 2021.08.01

Horror Life

「Horror Life」 딸랑거리는 동전 한 무더기가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지폐 한 장이 배꼽을 간질이는 낌새를 느껴 직감적으로 배에 힘을 주어 구겨 넣고 불리기 시작했다 두 장이 되고 세 장이 되고 제법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배보다 훨씬 더 큰 배들이 첨단의 Medical IT Tool로 배꼽에 구멍을 뚫는 것도 모자라 가슴으로 옆구리로 벤틀리 롤스로이스 마흐바흐 몇 대를 집어넣고는 Stock을 탱탱 불려 꺼억꺼억 되새김질로 소화를 시키더니 빌딩 몇 채 넣어 다시 배를 채웠다 이걸 옆에서 지켜보며 너무 부러워 죽게 생긴 내 손가락과 배꼽은 동전과 지폐를 모두 꺼내 구글에 아부하여 겨우 ‘마윈’ 표 가슴 절개 AI를 구해 많이도 말고 빌딩 딱 한 채만 집어넣으려 용을 쓰는데 삑..

2021.05.17

휘뚜루마뚜루」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2011 우리글≫ 「휘뚜루마뚜루」 신 게 질색인 홀아비는 배만 먹었고 단 걸 싫어하는 독신녀는 사과만 먹었다 홀아비는 항상 여자가 고팠다 독신녀는 남자가 필요했다 어쩌다 둘이 눈이 맞았다 혀도 맞았다 신 게 별 것이 아니었고 단 거 또한 별 게 아니었다 사과 맛들인 홀아비와 배 맛들인 독신녀는 휘뚜루마뚜루 걸신들렸다 맵고 쓰지 않는 한 둘은 지금 행복하다 ※ 휘뚜루마뚜루 :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 치우는 모양

202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