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현 화가 15

지게

◀인공지능이 지은 시▶ 72쪽 「지게」 내 등에는 꼭 붙어 있는 지게 하나 있다 아침 햇살을 지게에 진 날들보다는 비바람에 구르는 돌들 져 나른 날들이 많았다 대낮의 노동으로 거품 같은 재화를 구축할 때는 뒷덜미를 무겁게 짓누르는 고통이 뭔 줄 몰랐고 지게의 슬픔 따윈 생각지도 못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밤이 주는 평온을 몰랐다 지게가 신음하기 시작한 건 예순이 넘어서다 단 한 번도 지게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아프니 나도 아팠다 일심동체였음을 까맣게 잊고 지내 미안했다 가벼운 것만 지기로 했다 떨어지는 꽃잎 스쳐 지나는 하늬바람 서산에 걸린 붉은 노을 나뭇가지에 앉은 달빛 미소 샛별이 주는 새벽의 상쾌함

2021.02.01

코로나로 좋은 건

◀快' 조남현 화가▶ 「코로나로 좋은 건 」 어둠 내린 겨울 저녁 퇴근길 제법 북적이는 버스 빈 좌석 찾아 앉았습니다 옆자리 얼굴 반반한 오피스 우먼은 가방은 어깨에 메고 무릎 사이 낀 꽃 그림 시장 보자기에는 파란 대파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손에 꼭 쥔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회사 얘기를 쉴 사이 없이 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속삭이듯이 하는 말이 "얘 코로나로 좋은 건 하나 있어 '媤'자 붙은 인간들 얼굴 안 보는 거야!" 어쩌나 나는? 이 기막힌 얘기를 다 들었으니 말입니다

2021.01.12

춤을 추고 싶다

「무야의 푸른 샛별」 106쪽 춤을 추고 싶다 노랗고 붉은 것들이 여명의 태양처럼 춤사위에 뭉게뭉게 묻어나 부드러운 놀림의 어름새로 누군가에겐 베풂으로 누군가에겐 끌림으로 누군가에겐 파트너로 강하지 않아 지치지도 않는 그런 춤을 안단테칸타빌레! 빠른 시간들을 느리게 다독이며 가슴 깊은 상처들 끼리끼리 어우렁더우렁 춤을 추고 싶다 나를 위한 춤을 * 어름새: 구경꾼을 어르는 춤사위

2020.11.02

지하철역 앞 버스정류장

「무야의 푸른 샛별」 58쪽 지하철역 앞 버스정류장 시시한 건 반복되어진 사소하고 이기적 말들이 지루해지기 때문입니다. 있는 돈 자랑하려니 암내 난 꿩 소리로 들려 누군가 총 들고 쏘려 올까 겁나 그 언저리만 빙빙 돌다가 구린 입도 못 떼는 모양, 좋은 호텔에서 온 식구가 다 퍼질러 실컷 자고 먹고 해 놓고 겨우 한다는 말이 그 호텔 밥맛이 어쩌구저쩌구. 뭐 하나 읽는 게 귀찮아 나이 육십 줄에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보는 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어디 가서 말발 죽는 건 싫어서 아무도 믿지 않는 소싯적 공부 잘했다는 얘기 바락바락 핏대 세워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지겹게 듣는 이들 인내를 시험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지 공허한 하늘에 홀로 머리 박기란 느낌이 드는 순간 제풀에 제가 죽을밖에. 먹고 사..

2020.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