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無職의 세월

박산 2022. 12. 12. 14:52

「The Joy Of Freedom」 조남현 화가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무직無職의 세월 -

 

그 해 겨울 참 추웠다

눈 뜨고 일어나는 아침이 시렸다

갈 곳 없는 가장은 모든 게 비굴해졌다

 

양치질조차도 힘이 없으니 입안 거품에 신이 없고

세수소리 조차도 물방울이 잠잠하다

 

86년 그 해 겨울

바람이 몹시 불던 날

구겨진 자존심에

포장마차 소주가 다섯 병째 위장에 채워졌다

 

이상하리만큼 술은 더 이상 취하지 않았다

 

새로운 기운이 허허롭게 내 허파를 간지럼 태울 때

비로소 찡그린 얼굴에 알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어둑어둑 하늘은 그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뭉게뭉게 구름을 품고 있었고

숨어있는 달 모양으로 움츠러든 내 목은

스승인양 그 구름을 따르고 있었다

 

스무 해도 더 지난 이 겨울은

한 병의 소주에도 취하고

떠있는 구름에도 관심이 없다

 

잊혀진 씀벅씀벅한 추억은

이맘 때

간혹 그 무직의 세월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

 

스무 해 훨씬 전 그 해 겨울 12

사업에 실패한 나는 실업자였다

 

아침에 일어나 갈 데가 없었고

앉아 있을 책상이 없었다

 

그 때 놀아준 친구가 아직도 고맙다

그 때 술 사준 동료가 아직도 고맙다

 

지금 사업에 실패한 자여

실직하여 놀고 있는 자여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악한 세월은 약이요 그리고 진보 일러니

 

이십 년 후 그대는 분명코

지금을 조롱 할 터이니

 

이 한 번 악물어 보시라

분명 좋은 날이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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