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박산 2022. 3. 6. 08:41

이생진(1929~)

 

배신 ㅡ



시인이 섬에 갔다



지난 번 발자국을 찾다가

파도가 한 일 깨닫고는

낮은 모래 언덕에 사는 메꽃에게

그간의 안부 물었더니

나도 보고 싶었다 와락 반기는데

키 작은 순비기나무는 바람 불러 크게 몸을 흔들고

여러 해 산 통보리사초는 나잇값 하느라 웃고만 있었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 . .



그리움은 땅 속에 묻혀도 보인다구요

대나무로 보이고

메꽃으로 보이고

순비기나무로 보이고

통보리사초로 보이다가 금방 모래밭에 파묻힌다구요



시인이 세월의 발로 쓴 이 시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시가 功을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지금 이 섬에는

연예인 몇이 밥 먹고 떠들다 간 그 발자국을 찾는 이들로 넘친다



갯메꽃 순비기나무 통보리사초는 여전히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哭, 아이고 아이고!  (0) 2022.03.18
어머니 그리고 시  (0) 2022.03.07
유쾌한 신도림역 까치  (0) 2022.03.01
나는 컴퓨터다  (0) 2022.02.21
간만 보다 가는 에고이스트  (0) 2022.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