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그림자

박산 2025. 1. 19. 08:41

Gary Bunt(1957~ ) *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는 개리의 단순하고 투박한 터치에 숨어 있는 진중함이 좋습니다

 

 

=허무의 그림자

 

스무 해 넘겨 무위(無爲)를 지향했더니

허무의 그림자 더께가 끼어들어

사는 게 지루해졌습니다

 

변화가 절실했습니다

 

자주 안 먹던

두툼한 패티가 든 햄버거를 아구아구 씹어도 보고

장안에서 소문난 화덕 피자에 맥주를 마셔도

생의 혁명을 시도했던 열정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 비웠다 더 이상은 없다

 

그럼에도 무언가 자꾸 채워지는 낯선 느낌입니다

 

작은 서재에는 책들이 쌓였습니다

책갈피 여기저기에 시()들이 숨어 있고

이야기가 길어 읽기 어려워진 소설들도 신음 중이고

수필은 기척도 없습니다

저만치 괴테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소월은 낡아 헤질 지경입니다

천상병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갑자기 매운 게 당깁니다

무교동 낙지볶음을 먹을까

청진동 선지해장국에 다진 청양고추를 듬뿍 뿌려 먹을까

 

혀끝이 아린 마라샹궈를 먹습니다

돼지고기 한 점 새우 하나에 고수 얹어 씹으며

50도가 넘는 빼갈을 마셨습니다

정수리에서 이마를 거쳐 목덜미까지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입안이 평안해지는 동안은 잠시 잊히고 단순해졌습니다

 

익숙한 여인의 품 같은 문예지를

습관적으로 가만히 집어 듭니다

겉장을 펼치고 한 장 또 한 장을 넘기는데

문장 하나 하나가 옷 벗는 소리를 냅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시 한 줄에 말을 건냅니다

자 이제 편히 누우세요

손도 잡지 말고 입맞춤도 말고

천장을 응시하며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가만 있어도 우린

달콤한 초콜릿이고

잘 녹는 아이스크림입니다

포스티잇을 붙이고 갈피를 닫습니다

 

허무의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솜털 같은 시간이 흐르는 중입니다

다행입니다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시집 《가엾은 영감태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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