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영감태기 -
조막만한 몸도 덩치라고
어깨 벌려 걷는 팔자걸음이나마 제멋에 취하고
내가 왕년에로 시작하면… .
유도했다 태권도 유단자다
산에 가면 날다람쥐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간에
이 허세 달고 사는 기분도 괜찮은데
예순 훌쩍 넘어 그가 아쉬운 건 딱 하나 외롭다는 거다
의리 상실하고 5년 전 먼저 소풍 떠난 마누라가 밉다
하나 있는 딸년을 작년에 여의고 나니
집에서 밥해 먹는 일도 궁상맞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문화센터 스포츠댄스 배우러 갔다가
반년 만에 교양 만점 배 여사를 만났다
붉고 짙게 바르는 화장이 아니어서 좋고
꽉 끼는 바지 대신 치마를 입으니 보기에 여유로워 좋고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함께 마셔서 좋고
톡 까놓고 통성명은 안 했지만
얼핏 맞춰 보니 나보다 한 살 어려 또래인 것도 좋고
무엇보다 혼자 산다니
이 홀아비 마음 과부가 어련히 알까 그게 최고로 좋았다
만난 지 석 달이 지났다
밥도 먹고 공원도 갔었고 영화도 구경하고
살아온 얘기부터 사는 얘기까지 그럭저럭 많이 나눴다
헤어질 때면 그놈의 체면이 무언지
아직 남은 힘이 뭉쳐지면서
더 큰 외로움을 외롭다 말하지 못했다
이참에 아예 합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가에 미소가 돌았고
배 여사와 배를 맞추는 일까지 상상하니
이 나이에도 이부자리 설렘이 크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넌지시 뜻을 전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생을 함께하는 게 어떻겠냐고
시간이 필요하면 제주도라도 가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싫다!” 소리 없이 웃으며 헤어졌는데
다음 날부터 문자 소통이 일방 끊어졌다
열흘 후 배 여사의 눈이 째진 며느리가 찾아왔다
- 선생님, 순진한 우리 어머니께 그러시면 안 되지요
혼인신고도 안 하시고 함께 사시자니요
참 어처구니가 없네요
품위 있어 보이시는 분이
우리 어머니를 어찌 그리 만만히 보시는 거예요
함께 사시고 싶으시면 정식 절차를 밟으세요
(어린아이 타이르는 어조의 그녀의 말은 계속 됐다 … 중략…)
- (화도 나고 쪽도 팔리고...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조용히 일어나 커피값 내고 그냥 나왔다)
생각해 보니 향단이에게 껄떡대다 귀싸대기 맞은 방자 꼴 났다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옥방에 찬 자리여!"
이몽용이도 못 된 중뿔난 방자 신세가 더 서럽다
* 시집 《가엾은 영감태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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