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극장

박산 2024. 2. 12. 08:08

 

 

 

노량진 극장 1 -

 

1963년 허구한 날 빨간 줄무늬 난닝구셔츠만 입고 다녀서

내 친구 유신이는 별명이 '빨간 난닝구'이고

머리통이 약간 기울어진 경구는 그냥 '짱구'라고 불렀다

 

화창한 어느 날

노량진역 앞에 극장이 지어졌다

양철 슬래브가 기왓장 보다 더 미끈하게

한옥 지붕 선을 본떠 올렸는데

그 선이 볼수록 크고 멋 있었다

개업 축하 만국기가

빨래줄 같은 긴 줄에 걸려 나풀거리는데

아는 국기라고는 태극기 성조기 일장기 뿐 이었다 

 

샛강 하나 사이에 둔 여의도 비행장에서는

수시로 비행기가 뜨는데

빨간 난닝구는 '노량진 극장 개관 축하 비행' 때문이라고

바락바락 우겨 그럼 내중 뜨던 비행기는

무엇을 경축하려고 떴느냐 핏대 높여 싸웠다

울긋불긋 그려 붙여놓은 극장 간판에는

한문으로 '成春香'이라고 쓰여 있지만

성춘향 그 정도는 귀동냥 눈치코치로 때려잡아 읽을 수 있었고

여자 주인공 이름이 너무 아름답고

까무러칠 정도로 우아했다

'은희' '최은희'

미자 미숙이 숙희 숙자 영희 영자 영숙이만

내 주위에 득시글득시글 했었다 

 

빨간 난닝구도 짱구도 이 영화를 못 보았지만

나는 유쾌 통쾌하게도 다 보았다

관객 만원사례 써 붙였지만

좌석 들어가는 통로 사이사이에

신문지 펴서 쪼그려 앉고

스크린 앞 공터에도 빽빽하게 종이 깔고 앉았고

이나마도 '볼 자리' 없는 이들은

경찰관 임검석 앞 까치발로 섰고

따라 온 아이들은 어른들 어깻죽지에 매달려 보았다 

 

영화 시작 전 불 켜진 어수선한 극장에서

사각 판때기 광목 두 줄로 가슴에 걸고는

"껌 있어요! 오징어 있어요! 땅콩 있어요!"

외치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 들 중에는 우리 반 키 큰 코흘리개 영철이도 있었다

그 가 나를 보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냥 덤덤하게 그 를 볼 뿐인데

무언지 모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춘향이 옥중 눈물에 탄식을 자아내고

"암행어사 출도야!"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패랭이 쓴 육모방망이들이 변학도의 잔칫상을 뒤엎을 때면

"~! " 하는 함성과 요란한 박수소리가

장내를 떠나가게 했다 

 

그 순수의 열기에 푹 젖은 시끄러움 속에

끝난 줄도 모르고 있던 나는

잡아끄는 손에 이끌려 아쉽게도 끌려나왔다

한 번 더 보고 싶은데도 

 

 

 

노량진 극장 2 -

 

1963년 그 해 그 날이 지나면서 나는

극장 단골이 되었다

극장 간판 그리는 화랑 임대 주인의 아들 혜택으로

어린 내 손에도 초대권 몇 장이 간혹 쥐어졌다 

 

하도 많이 들락거렸고 그 조차도 여의치 않은 날은

모르는 아저씨 손도 붙들고 들어가고

그러다 걸리기라도 하면

학교 안 다닌다고 바락바락 우기기도 하고

또래보다 큰 키를 억지로 숙이기도 하고

줄서서 들어가는 아줌마 아저씨 사이에

슬쩍 끼어서도 들어가

별의별 영화를 다 보았다 

 

케리 쿠퍼가 존 웨인이고 존 웨인이 그레고리 펙 이었다

그레이스 케리가 오드리 헵번이고

오드리 헵번이 소피아 로렌이었다

장동휘가 최무룡이고

최무룡이 남궁원이었다

남들은 신성일이 좋다는데 나는 신성일이 싫었다 

이유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뾰족뾰족하게 생긴 게 '밥맛'이었다 

 

어쨌든 잘 생기고 예쁘면

그 주인공이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 둘 구별 지어 이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남은 것은

어린 아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후유증으로

12살에 이미 실연했다 생각하고

15살에 어른이란 착각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후일에는 감성이 이성을 앞서는

남는 장사란 생각이 들었다

공부 안 한 것 빼고는 

 

그 유치한 실연 뒤에 얻은 나의 연정의 첫 상대는

아름다운 배우 '남정임'이었다

초연, 망향, 빙점 ,,,

아직도 영화 제목이 뇌리에 남아있다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항상 노란 개나리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아리랑' 화보 한 자락에서 찢어낸

그녀의 노란색 수영복 차림의 사진은

내 영어책 갈피 속의 혼자만 보는 비밀이었다 

 

빡빡 밀어 감출 것도 없는 내 머리통

운동복과 도복으로 불룩한 내 책가방

덩치만 불룩했지 비밀이랄 것도 없는

누구나 뒤져 볼 수 있는 그런 개방구開放區였지만

수시로 극장에 드나드는 내가 못내 밉기만 했던

빨간 난닝구도 짱구도 그 때는 이미

어디론가 떠난 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은망덕하게도 노량진 극장은 3류 극장이라고

우습게보게 되었고

단성사, 피카디리, 스카라, 대한극장의

지린내 덜 나는 화장실이 익숙해졌다 

 

그래도 가깝고 싼 맛에 노량진 극장을 종종 다녔다

어느새 몸은 근육과 군데군데 모발이 그럴듯해지고

극장 주위에 기생하는 아무개 파 누군가가

째려보고 시비 걸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남정임이 싫어졌다

그러다가 문희가 좋아지더니

다시 윤정희로 바뀌었다 

 

생자 이생진 시인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출판기념회 후(포장마차 포장에 시인께서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그리셨다)

 

노량진 극장 3 - 

 

 

지금은 없어져버린 극장이지만

아직도 나는

노량진 극장에 다니고 있다

그 터에

팔리고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 바닥 아래에는

그 고귀한 스크린 속의 수많은 영혼들이

그 때 그대로 연기 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걸 느끼는 나는 케케묵어 문드러진

하나 남은 항아리 속 골마지 낀 짠지다 

 

흐리거나 비 오시는 날

덥고 추운 계절이 변덕을 부려 바뀔랴치면

그 스산함을 이기지 못하고

노량진 극장에 가고 싶다 

 

나만이 은밀히 호흡할 수 있고

스크린 속의 그 영혼과 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극장엘 가고 싶다 

의자가 우중충하고

곰팡이 냄새가 코끝에 헛헛하게 배여오고

내 친구 코흘리게 영철이가 파는

오징어 다리에 땅콩을 말아 씹고 싶고

앞좌석 키 큰 양반 삐져나온 머리통 피해

툴툴거리며 자리를 옮겨야 하는 그런 극장엘 말이다 

 

거기서 나는 나의 연인이었던 남정임을 다시 만나고

오드리 헵번의 뒤로 꽉 붙들어 매어 놓은 머리칼을

살짝이라도 건드려 보고는

샐쭉하게 눈 흘기는 그녀에게 미안해 해보고 싶다 

 

그 감성에 그 유희가

얼음 조각처럼 녹아 버린 찰나의 환희 일지라도

나는 지금 다시 그 1963년의

유치찬란한 그 노량진 극장에 있다 

 

 

* 박산 시집 《 '노량진 극장' (200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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