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

난 머슴이로소이다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난 머슴이로소이다 - 에헴, 게 아무도 없느냐! 소리 지를 일도 없고 그저 세파에 아부나 할 양으로 중얼중얼 나 죽었오 나 죽었오 쥐 죽은 듯이 골목이나 기웃거리다 막걸리 한 사발에 고기 한 점 씹어 쪼꼼 커진 간덩이로 내뱉는 분노 에이 엿 같은 세상! 쌍시옷 섞었다가 누구 듣는 이도 없는데 움츠려 휘휘 사방을 둘러본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이리 오너라 아침 늦잠은 상전들의 특권 깨우는 이 없어도 깜깜 새벽 발딱발딱 일어나 개꿈 해몽에 들이대는 어설픈 주역 64괘 새벽을 서성이는 난 머슴이로소이다

2022.03.23

마음씨짱

마음씨짱 ㅡ 열 번 가면 열 번 다 환한 얼굴로 반기는 우리동네 빵집 주인 아가씨는 웃음꾼이다 ㅡ 오셨어요 어르신, 이 쪽이 방금 구운 빵입니다 ㅡ 어르신은 좀 그러니 바꿔 불러주면 안 될까요 ㅡ 아 예, 선생님이라 부를까요 ㅡ 아니 동네 아저씨니 아저씨가 친근해서 좋아요 ㅡ 네 아저씨, 오늘 서비스로 초코빵 하나 더 넣었습니다 ㅡ 아이고 참 우리 여사장은 마음씨짱이네 ㅡ 짱이요? 그것도 마음씨짱이란 예쁜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아저씨짱입니다! 동아일보 손진호 어문기자의 책 《우리말글》에 언급된 말글 '마음씨짱'을 슬쩍 빌려 썼다가 '아저씨짱'이란 흐뭇한 소리를 들었다

2022.03.20

哭, 아이고 아이고!

哭, 아이고 아이고! ㅡ 1960년대 내가 열 살 무렵 상갓집 가시는 조부는 곰방대 털어 놋재떨이에 반듯하게 올려놓고 거울 앞에 앉아 긴 수염을 가위로 다듬고는 두루마기 곱게 펴 제대로 차려 입고 "입성 잘 차려 입어라 강대골(양녕대군 묘지 동네 상도동) 김 씨댁 문상 가야 하니" 짚세기 사잣밥에 조등이 걸린 대문 들어 문상객 접대 술상들로 시끌시끌한 마당을 지나 대청마루 올라 굴건제복의 상주가 지키는 상청에 향 올리고 절하는 조부는 아이고 아이고! 상주 따라 곡을 하고 나 역시 아이고 아이고! 합창을 했다 술 한 방울도 입에 안 대는 조부는 떡에 돼지고기 몇 점으로 문상객들과 담소한 후 내 손을 잡고 귀가하면서 구성지게 곡을 따라하는 손자가 신통해서인지 "잘 했다, 문상할 때는 꼭 그렇게 곡을 해야 하..

2022.03.18

어머니 그리고 시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어머니 그리고 시 - 단풍 든 가을 치매 진단 받은 어머니 병원 모시고 간다 병원 진찰하고 약 탄 후 “뭐 잡수고 싶으세요” “갈비탕” 자주 가시는 단골 갈비탕 집 질리지도 않으신 모양이다 가을 구경시켜 드리려 가까운 숲을 찾았다 느린 걸음 산책하시는 어머니 난 벤치에 앉아 시첩을 꺼내 뭔가 끼적거렸다 어느새 다가오신 어머니 “시 쓰냐?” “네 그냥 요” “시가 재미있냐?” “재미는요 뭐 그냥 쓰는 거지요, 옛날에요..... 서양사람인데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짓는 일이고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하이데커’ “그래?” “이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래 시 쓰는데 무슨 죄가 있겠니” 성질 급한 단풍 하나 어머니 ..

2022.03.07

배신

배신 ㅡ 시인이 섬에 갔다 지난 번 발자국을 찾다가 파도가 한 일 깨닫고는 낮은 모래 언덕에 사는 메꽃에게 그간의 안부 물었더니 나도 보고 싶었다 와락 반기는데 키 작은 순비기나무는 바람 불러 크게 몸을 흔들고 여러 해 산 통보리사초는 나잇값 하느라 웃고만 있었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 . . 그리움은 땅 속에 묻혀도 보인다구요 대나무로 보이고 메꽃으로 보이고 순비기나무로 보이고 통보리사초로 보이다가 금방 모래밭에 파묻힌다구요 시인이 세월의 발로 쓴 이 시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시가 功을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지금 이 섬에는 연예인 몇이 밥 먹고 떠들다 간 그 발자국을 찾는 이들로 넘친다 갯메꽃 순비기나무 통보리사초는 여전히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22.03.06

유쾌한 신도림역 까치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유쾌한 신도림역 까치 - 나는 교류 25000 볼트가 흐르는 1호선 신도림역 상공에 거주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곡예사다 시커멓게 그을린 깃털을 움츠리고 도림천변 다리 밑에 썩고 있는 나의 종족을 종종 본다 그래도 나는 고압선 사이를 날아다니며 들고나는 전동차와 벌이는 아슬아슬한 유희가 좋다 그가 종일 쏟아내는 플랫폼 사람들 표정이 울고 웃고 너무 재미있다 한가한 대낮 전철 맨 뒷문 앞 예쁜 여자 스커트자락 밑동 흘린 새우깡 부스러기를 주워 먹다 엉큼하다 발로 내 치인 적도 있다 움찔 놀란 척 날 생각도 안하고 뒷걸음질 쳤지만 실제 놀란 건 아니다 50 센티미터도 안 되게 가까이 가 보았자 정신 놓은 사람들은 아는 척도 안한다 그래도 먹을 것 있는 냥 바..

2022.03.01

나는 컴퓨터다

시집 《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나는 컴퓨터다 - 이끼 낀 내 하드웨어는 매일 먹는 고혈압 약 몇 알에 잠잠하고 수전증 걸린 내 마우스는 알코올 몇 방울에 종종 의존하지만 삐걱거리는 바디 역시 눌러 지압할 스위치만 잔뜩이다 내장된 소프트웨어 몇 개는 헐어 아예 갈아야 하는데 몇 종류의 위장약은 내성(耐性: tolerance)만 더 키우고 삥삥 아프게 소리 나는 건 점점 더하다 사람은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다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모니터는 성기이고 바이러스에 약한 컴퓨터는 비아그라를 찾는다 나는 컴퓨터다 * 진화론의 이론적 구조(이기적 유전자: selfish gene)를 쓴 Richard Dawkins는 “사람은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전파를 위해 만든 생존 기..

2022.02.21

간만 보다 가는 에고이스트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간만 보다 가는 에고이스트 - 너무 잘난 사람들 너무 있는 사람들 시건방지고 혹여 가진 거 빼앗길까 보아 옛 친구는 떨거지라 애써 잊고 이사람 저사람 새로 사귈 생각만 하고 짠가 매운가 신가 쓴가 단가 슬쩍슬쩍 골고루 핥아 보고는 제 간에 안 맞을라치면 언제든지 뱉으려 합니다 미역국에 몇 방울 떨구기만 해도 감칠맛이 입안 가득 사르르 혀를 감는 오래 묵은 간장 맛같이 벗도 그냥 웃어주는 오랜 벗이 좋습니다 큰소리로 호들갑 떠는 이들이야 퍼먹고 노는 술자리에서나 좋지요 소쩍새 소리 저만치 들리는 숲길 홀로 걷다 홀연히 떠오르는 그리운 친구 맛난 음식에 향 깊은 술잔 앞에 두고 간절히 함께 나누고 싶은 친구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중얼거리다 나도 모르게 눈물..

2022.02.18

詩詩한 2월 일기

詩詩한 2월 일기 ㅡ 입춘 지난 날씨 정오에도 영하 4도 아직 목덜미가 차갑다 매운 주꾸미 비빔밥 한 그릇에 나는 동동주 반 방구리를 마셨고 술 한 방울도 안 하는 O형은 왕새우 튀김에 콜라를 마셨다 평소 절대 안 걷는 게 원칙이라는 양반이 웬일로 커피숍 대신 인근 천문대를 오르잔다 코로나 시국에 찻집 가는 일도 마음 불편하던 차에 옳다구나! 야트막 산자락 들어 도란도란 걷다가 한 10분 아니 15분 녹지 않은 눈이 드문드문 쌓인 오르막 계단을 오르는데 스틱까지 거머쥔 거친 숨소리로 하는 말이, ㅡ 남들은 웃겠지만 나는 여길 오르는 일이 히말라야다 푸하하하! 뻥이 세긴 너무 세다! 문 닫힌 천문대 볕 좋은 벤치에 앉아 살아오고 살고 있는 그렇고 그런 얘기 나누다 내려오니 날이 많이 풀렸다 도심 숲속 양봉..

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