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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운 놈 -

「구박받는 삼식이」 86쪽 부러운 놈 - 잘잘 끓는 아랫목에 누워 마누라 엉덩이 통통 두드리다 조물조물 허리라도 안을라치면 실쭉 눈 흘겨 이부자리 밖으로 톡 튕겨 빠져나가며 “아침밥 지어야지” 그 한 마디가 남긴 작은 공간의 갑작스런 썰렁함이지만 가진 것 많지 않은 꽃자리 좁은 남편에겐 가슴 그득 큰 행복 이다 별 볼일 없는 쥐꼬리 월급쟁이 하릴없는 소시민 지아비를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는 지지리 공부 못하고 얼굴까지 못생긴 아들놈이지만 어깨가 부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고 곧 늙어 힘 빠질 우리 아부지 제일 좋아하는 술 안 받아주는 놈 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하겠다는 딸년은 가슴속에 넣고 다니는 또 다른 큰 행복이다 잘사는 놈이 십박 며칠 유럽여행 가자 해도 내 꼬락서닐 알아야지 하고 참고 그냥저냥 만만..

2020.10.19

말마투리

「노량진 극장」 56쪽 말마투리 마음이 허허로운 날은 동심에 젖어 누군가에 편지를 쓰고 싶다 편지 속 스크린 주인공은 다 어리고 엑스트라는 다 어른이다 아련하게 *피끗 떠오르는 어린 날 그 때 그 아이의 까르르 웃던 목소리도 듣고 싶다 잠지 내 놓고 아장거리던 그 걸음으로 발음이 훨씬 진보한 지금의 언어를 들려주고 싶다 힘들었던 얘기 말고 맛있었던 혀의 수다로 불룩하게 배 불리고 싶다 그래도 **말마투리 남아 채워지지 않는다면 소싯적 어깨동무로 깡충깡충 뛰고 싶다 편지 말미에는 안녕이란 말 대신 그냥, 실없지만 세련된 말 '사랑한다' 쓰고 싶다 * 피끗: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빠르게 잠깐 나타나 보이는 모양 ** 말마투리: 말을 다하지 않고 남긴 여운

2020.10.12

구름숲

「인공지능이 지은 시」 78쪽 구름숲 하늘 걷다 만난 바람에 떠밀려 이리저리 헤매다 구름숲에 들었다 풀과 나무는 유동적이다 사이사이 개울도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 물고기도 구름 타고 날아다녔다 부리가 무뎌진 독수리가 순간의 유체 변형으로 참새가 되었다 얼핏 무질서한 작은 움직임들로 보이지만 한낮은 평화이고 밤은 고요다 작은 바람을 시작으로 조그맣고 동그란 물방울이 하나둘 맺혔다 희고 검음이 없어져 낮과 밤이 사라졌다 개구리 몇 마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새들도 따라 불렀다 생명을 지닌 것들이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때론 불협화음으로 들렸지만 숨차 쓰러질 듯 찢기는 보컬보다는 전기 기타의 긴 울림이 지배하는 락페스티벌이련 했다 익숙한 지상의 그림이 어른거리는가 싶었는데 모든..

2020.10.05

내가 낸 길

「인공지능이 지은 시」 52쪽 내가 낸 길 자주 다니는 뒷동산 숲에 사색을 위한 나만의 길을 냈습니다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풀 뽑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지요 하루 두어 시간씩 닷새에 걸쳐 장갑 낀 손노동으로 한 쉰 걸음 정도의 길이 났습니다 호젓하게 들어 있다가 모기에게 수없이 물렸지만 다람쥐도 만나고 새 소리도 듣고요 한 해가 지났습니다 두 해도 지났습니다 백 걸음 정도로 길어졌습니다 혼자 다니는 길이 영원히 혼자일 수는 없겠지만 이백 걸음을 원치는 않습니다 노란 숲에 난 두 갈래 길에서 이 길 저 길 망설였던 시인을 뵌다면 직접 길을 내시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도 나는 숲을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다 나만의 길을 또 낼까

2020.09.28

무화과

「무화과」 누가 내게 가장 맛있게 먹은 과일을 고르라면, 단연 2018년 압해도 과수원에서 먹은 무화과라 말할 것이다. 아삭하게 씹히는 씨앗 덩이에 끈끈한 당액이 골고루 버무려져서 껍질의 부드러움과 함께 입에 스며들면서 혀를 감아 부드러움을 더한 목 넘김이 황홀했다. '왜 이렇게 맛있는 우리 과일을 그동안 못 먹었지' 란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여행 중에 맛보았던 망고스틴, 자줏빛 껍질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 껍질을 벗겨 향긋한 흰 과육을 꺼내 입에 넣으면 달콤함이 순간적으로 혀를 점령시키는 첫 키스 같은 맛, 이 맛 역시 얼마나 반복하고픈 욕망을 부르는 혀의 중독성이 있었던지, 씨엠립 시장에서 한 봉지 욕심껏 가득 채워 산 망고스틴을 호텔 방에서 입에 단내가 날 때까지 정신없이 먹을 정도로 잊을 수 ..

나의 이야기 2020.09.21

청춘의 덫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70쪽 청춘의 덫 벌어 먹고사느라 늘 시간에 쫓기는 무모한 청춘을 보냈던 내가 언제부터였던가 쌓이고 쌓인 그 시간이 상으로 내어 준 세월 덕택에 이젠 내가 지배하는 시간에서 꿈에도 그리던 낮술을 마신다 술을 좋아하는 게 무엇보다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역시 시간에서 해방된 유유상종의 몇 안 되는 벗이 있음이다 비틀거릴 정도로 낮술 마시기엔 기력 쇠했음을 잘 아는 처지이고 그리 막갔던 청춘은 없었기에 소풍 떠난 지 오랜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딱 반주 한 잔씩!" 을 버릇처럼 외친다 이제껏 낯설었던 낮 커피를 마신다 국밥에 씹혔던 파 마늘과 막걸리 소주 냄새를 헹군다 엽차 한잔에 레지 눈치받았던 다방보다 ‘셀프’라는 독립성에 몇 갑절 편하게 담소한다 누군가에 보고할 것도 누군가에 굽..

2020.09.17

방울소리

시집 「노량진 극장」 44쪽 방울소리 가을이 다가오면 뉘엿한 해 등 뒤로 황토 길을 걷는 나귀 목에 걸린 규칙적인 방울소리는 왜 들리는 것일까 이명이 온건 분명하지만 싫지 않다 물살 고운 강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낮은 음정으로 산소 토해 내는 도심 속 작은 숲의 종소리로 어두운 지하철 웃지 않던 검은 요정의 옅은 미소로 빌딩 숲 좁은 길가 더위에 지쳤던 벤치의 자장가로 성량 달리는 가수의 편안한 백 뮤직으로 밤하늘 외로운 별 하나 저 편 은하수를 부르는 간절한 손짓으로 결국 이명인가 하여도 참을 줄 모르는 금속성 방울소리는 그치지 않고 얕은 바람에도 나뭇가지 흔들거림이 수선스럽다 가을이 이 만치 들어와 있는 건 분명하다

2020.09.14

솔리스트 Solist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78쪽 솔리스트 Solist 지휘봉 따라하는 연주가 싫어 독립했다 고독은 외로웠지만 집중을 주었다 이슬 한 방울 떨어지는 작은 소릴 내다가도 변덕 끓어 미친 듯 천둥소리 에너지를 소모했다 때론 물질을 향한 욕망에 힘겨워 울었다 부실한 악기 탓을 한 적도 있지만 결국 다 내 부족임을 잘 안다 난 솔리스트니까 그래도 누군가의 간섭이 없어 좋았다 말은 훨씬 줄었지만 제 흥에 겨운 맛에 종종 취했다 누군가 들어주는 이가 생겼다 감사에 대한 간단한 예의를 빼곤 그냥 인간에 대한 애증을 연주하려했다 태풍 바다 너울 파랑에 요동치는 쇠사슬에 묶여 정박 중인 어선인 양 삶이 힘겨워 지루하게 버둥거리는 곡들도 이 악물고 수평을 생각하며 인내했다 난 솔리스트니까

2020.09.07

조 사장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56쪽 *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태풍 부는 날,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나 하면서 냉면 한 그릇으로 점심 약속을 하고 나니, 불현듯 이 시가 생각나 올려 봅니다. ◁ 조 사장 ▷ 불알친구 조 사장 동대문시장 원단 장사 그의 이마 주름만큼 이력 깊지만 “돈 좀 버냐?” 한결같이 “그냥 그렇지 뭐” 만난 지 반세기가 넘도록 약속 시간 단 한 번 어긴 적 없는 신사 내겐 그냥 허투루 해도 되겠건만 톱니가 시겟바늘 돌리듯 정확하다 술 못 마시는 체질 잘 알면서도 내가 따라주는 막걸리를 홀짝홀짝 성의껏 들이키는 배려 작가 Y가 내게 묻기를 맘 편히 함께 여행할 친구 있느냐기에 조 사장, 이 친구 있기에 망설임 없이 있다 했더니 예순 줄 나이, 그런 친구 있다면 행복한 거란다 어제 점심..

2020.09.03

하늘 본 지가 언젠데!

「인공지능이 지은 시」 26쪽 *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9시 평소 십여 명의 승객이 탔었는데 버스에는 덩그러니 나 혼자였습니다. 이런 날엔 이 작은 섬 동네를 거닐다 아무 얘기나 나눌 어부를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 하늘 본 지가 언젠데! ▷ 큰 섬에 붙은 작은 섬 뒷동네 다 해 봐야 대여섯 가구 사는 마을 갈대 하늘대는 둑방 아래 논길 걷다가 야트막한 언덕 아래 작은 포구를 만났다 파랑에 엎어질 것 같은 배를 부두에 묶어 놓고 그물 손질 중인 예순은 족히 들어 보이는 부부에게 앞 섬 이름 이것저것 묻는 여행자의 말 붙임이 싫지 않았던지 마시던 깡소주 한 잔을 건네며 살아온 이력을 판소리하듯 들려주는 데 재밌다! 스무 살 때부터 고깃배를 탔..

2020.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