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28

봄바람

「봄바람」 동백이 붉어도 나 보기엔 마냥 수줍게만 보입니다 아직 찬바람은 창연하게 걸린 풍경 소리를 나지막이 부르고 있습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길섶에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뭉쳤다 흩어지며 털을 부빕니다 마른 잣나무에 물기 오르니 다람쥐 눈망울은 분주해지고 바람은 또 기웃하며 어정거립니다 비탈 데크 계단을 오르며 햇빛에 비친 그림자를 앞세우다 문득 당신 생각이 납니다 과거에도 있었을 나무에 기대 미래에도 있을 광경을 내려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로 겹쳐집니다 뭉게구름 한 뭉치가 잠시 해를 가리고 있지만 으레 그랬던 일처럼 무심합니다 지금 무얼 하고 계신가요 나는 그대 그리움을 만들고 있는데 바람은 또 귀를 간지립니다 희망이 절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꿈을 꾸었지요 까마득한 얘기는 ..

2021.03.02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碧海停泊' 이광무 화백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 1963년 노량진 극장 우리 반 코찔찔이 영철이가 흰 광목 목판을 앞으로 메고는 "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사이다 있어요 콜라 있어요!" 큰소리로 외치며 장사를 했었다 죽기 살기로 먹고살 일도 없는 지금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을 그냥 질겅질겅 씹으며 살아야 하는데 시 쓰는 일조차도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평생 여유 없는 심보를 고집하는 내가 밉다

2021.02.22

내가 낸 길

「雪之微笑」윤영호 사진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52쪽 「내가 낸 길」 자주 다니는 뒷동산 숲에 사색을 위한 나만의 길을 냈습니다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풀 뽑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지요 하루 두어 시간씩 닷새에 걸쳐 장갑 낀 손노동으로 한 쉰 걸음 정도의 길이 났습니다 호젓하게 들어 있다가 모기에게 수없이 물렸지만 다람쥐도 만나고 새 소리도 듣고요 한 해가 지났습니다 두 해도 지났습니다 백 걸음 정도로 길어졌습니다 혼자 다니는 길이 영원히 혼자일 수는 없겠지만 이백 걸음을 원치는 않습니다 노란 숲에 난 두 갈래 길에서 이 길 저 길 망설였던 시인을 뵌다면 직접 길을 내시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도 나는 숲을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다 나만의 길을 또 낼까

2021.02.18

요보록소보록

◁구박받는 삼식이 19쪽▷ 「요보록소보록」 움켜쥐었던 재물이 눈 감은 주인 따라가려다 관 뚜껑에 걸렸다 세상 이치 배울 만큼 배웠다 큰소리 뻥뻥 치면서도 내 배 채울 줄만 알았다 모래 한 줌 움켜쥘수록 요보록소보록 빠져나가는 빤한 이치를 무시했다 아는 것들 가진 것들 요보록소보록 들고 나는 구멍을 욕심으로 막은 결과다 묘지 속 관 뚜껑 위에는 요보록소보록 못하는 영혼이 썩은 재물과 산다 * 요보록소보록 : 알게 모르게 야금야금 빠져 나간다는 제주방언

2021.02.15

아버지

「아버지」 평생 술 한잔 하시는 걸 못 뵈었다 노랫가락 흥얼거리시는 모습도 못 뵈었다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몸가짐을 못 뵈었다 눈물 흘리는 모습도 못 뵜다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부모 없이 자란 박복함으로 연예나 오락이 가당키나 했고 슬픔에 기댈 여유조차 있었겠나 거울 보고 면도를 하다가 시나브로 희어진 수염과 기름기 빠진 피부에 검은 점들이 늙은 아버지 얼굴과 겹쳐진다 난 술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제 성질 못 이겨 짜증도 팍팍 내다가 통곡의 눈물을 펑펑 흘린 적이 많았는데 미안하다 아버지께

2021.02.12

Identity

시집 『노량진 극장(2008 우리글)』 78쪽 「Identity」 작은 다툼에도 마음이 곯아 명치끝이 아립니다 성질 나빠 그러려니 해도 곰곰 따지고 보니 살아온 인생에 정직하지 못 함이 그새 드러나곤 합니다 누가 좀, 그런 나를 혼 내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각질이 굳어버린 뇌실(腦室)로부터 나온 삶아 뭉그러진 물감자 같은 비굴한 타협은 조건 없는 용서를 계속 합니다 그 용서의 반복은 자비스런 부처님과 자애하신 예수님에게도 따귀 맞을 일입니다 진전이 없는 생활은 권태로움을 더 하고 믿음 없는 자만은 오만을 부르더니 배움이 없는 답보는 결국 위선을 잉태 할 뿐입니다 그 잉태가 만들어내는 다툼은 보기 싫게 찢어지고 빛바랜 붉은 꽃무늬 스커트자락이고 어린 아해 먹다 거리에 떨어뜨린 고추장 묻은 떡볶이 한 조각..

2021.02.08

지게

◀인공지능이 지은 시▶ 72쪽 「지게」 내 등에는 꼭 붙어 있는 지게 하나 있다 아침 햇살을 지게에 진 날들보다는 비바람에 구르는 돌들 져 나른 날들이 많았다 대낮의 노동으로 거품 같은 재화를 구축할 때는 뒷덜미를 무겁게 짓누르는 고통이 뭔 줄 몰랐고 지게의 슬픔 따윈 생각지도 못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밤이 주는 평온을 몰랐다 지게가 신음하기 시작한 건 예순이 넘어서다 단 한 번도 지게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아프니 나도 아팠다 일심동체였음을 까맣게 잊고 지내 미안했다 가벼운 것만 지기로 했다 떨어지는 꽃잎 스쳐 지나는 하늬바람 서산에 걸린 붉은 노을 나뭇가지에 앉은 달빛 미소 샛별이 주는 새벽의 상쾌함

2021.02.01

감성적 TV 사기

「감성적 TV 사기」 나의 TV 시청 프로그램은 3월부터 10월까지 메이저리그(MLB)가 가장 중요하고 여행 그리고 추리 수사극에 한정됩니다. 지난해 11월 MLB 야구 시즌이 끝나자마자 서재의 작은 내 전용 TV가 맛이 갔습니다. 야구 시즌도 끝나서 시즌 시작하는 봄에나 사야지 했는데, 새해 들어 아내 전용인 거실의 메인 TV에 실금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보는 TV야 금액으로 따져 크게 신경 쓸 일 아닌데 온 가족이 보는 메인 TV는 얘기가 다릅니다. 내가 보는 45인치 서재용 TV나 한 대 사면 됐지 했는데, 배보다 배꼽이 한참 더 큰 메인 TV 75인치를 구입해야 한다고 집사람과 딸은 주장합니다. 작은 평수 아파트에 무슨 75인치냐 하고 절충한 끝에 65인치로 겨우 합의(?)를 끝내고 서너 ..

나의 이야기 2021.01.29

그가 전화 했다

◀무야의 푸른 샛별, 60쪽 ▶ 「그가 전화 했다」 함박눈 내리는 날 그가 전화 했다 약간은 탁하지만 익숙한 음성으로 여기 오대산이야 쪽 뻗은 느릅나무 숲 툭툭 몇 뭉치 눈이 떨어졌다 작은 움직거림 새들 은은한 동종 소리 시린 귀를 덮는 순간 그의 말이 다시 들렸다 온 지 좀 됐는데 종로 뒷골목 술집이 그립다 여기서 살까 왔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그리고 말이야 저번에 갔던 그 집 매운탕… 눈보라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바지춤 내려 흔들어 포물선 그어 시원하게 오줌 줄기 뿌리고는 통쾌한 기분으로 풀썩 큰 대자로 누웠다 쉼 없이 쏟아 뿌려대는 하늘이 위대했다 흰 숲에서 들리는 꼼지락거리는 소리 눈동자 맑고 검은 고라니 한 마리 뒤뚱거리며 지나갔다 그의 말이 다시 들렸다 밤이 무서워 아니 싫어 겨울바람..

2021.01.25

겨울 숲

「맹종죽림」고창, 윤정숙 찍음 「겨울 숲」 바람은 어둠 따윈 개의치 않는다 볼때기 시리게 쌩쌩 때리는데 숲이 “잘 있었냐?” 묻는다 그 길고 추운 고독 알 것도 같고 그냥 휙 지나치기 미안해 그래 너는 어때 하고는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는데 황색 점퍼 입은 노인이 지팡이 짚고 낙엽 부스러기를 발끝에 질질 끌고 지나간다 햇빛은 어두운 숲을 포기하지 않고 하늘 향해 벌거벗은 나무 꼭대기에서 소리 없이 웃으며 서성인다 빨간 바지 파란 파커가 어울리는 여인이 검은 선글라스로 어둠을 더하면서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스쳐 지나간다 숲은 저 여인하고도 말하고 싶어 나무 몇 그루를 흔든다 숲을 빠져나왔지만 노인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다 돌아본 숲이 표정 없이 잘 가라 손짓이다 바람은 여전히 차다 시집『인공지능이 지..

2021.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