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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형님!

독일의 화가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1751-1828)이 그린 이탈리아 여행 중의 괴테 초상화(1787년 작).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중에 티슈바인을 만나 함께 나폴리에 다녀오기도 했다. 괴테 형님! ㅡ 2500년 전 철학자를 불러내어 형! 이라 불렀던 나훈아 흉내내 봅니다 겨우(?) 200여 년 앞선 형님! 괴테 형님! 어마무시하게 칭송되는 존경스런 문학적 업적도 그러하지만 이 미물이 정작 부러운 건 괴테 형님께서 그리 좋아하시는 그 많은 여성들을 만날 때 마다 작품에 깊은 감성으로 인간이 지니는 본성의 자유를 투영했다는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이 “당신이야말로 인간이다”했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 아닌가 슬쩍 부아가 나기도 해서, 아마도 번역자의 오류다 억지 꾸겨 넣기로 자위했습니다 그래도 혹자가..

2021.04.08

화엄사 4월, 새벽 이야기

박산 시집 『노량진 극장』 31쪽 「화엄사 4월, 새벽 이야기」 - 화엄사 기상 호텔방 옆에서 잔 벗은 부처를 만나러 새벽 4시 방문 열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나갔다 이불 속 눈만 감고 있는 나는 시詩를 만나려고 여명黎明을 기다렸다 부처를 만나는 시간이나 시를 만나는 시간이나 다 새벽이고 아침이다 나도 어서 일어나야지 - 새벽 새 소리 새벽어둠 발자국 죽여 조용히 지나는 내 소리가 시끄러운가 반기는 소리가 아니지 저 소리는 숲의 적막을 깨는 내가 미워 그럴 거야 시커먼 내 그림자도 무서워 그럴 거야 그렇다 한들 그리 시끄럽게 울지 마라 알고 보면 난 예순 넘은 너그러운 아저씨란다 - 화엄사 입구 개울가 붉은 벚꽃 붉은 늦벚꽃 몇 잎이 새벽 개울 흐르는 소리에 슬피 떨어진다 개울 깊은 탓에 남보다 며칠..

2021.04.01

뻔뻔한 계좌번호

「 뻔뻔한 계좌번호 」 한 다리 건너 소개로 보냈던 원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편집자와 전화 대화 중에 "계좌번호 문자로 주세요!" "내 전화번호와 같고 IBK입니다" 문자도 필요 없이 금융 소통도 이리 편리한 세상이다 친구 딸 결혼식 양가 제한된 하객으로 예식장 가까이 사는 부자 벗 J가 대표로 참석하겠다 해서 송금하여 내 축의금 봉투를 부탁했었는데 J 역시 불참하게 되어 송금 돌려 주겠다 계좌번호 묻는 중에 " J야! 달랑 내가 보냈던 돈만 넣지말고 이왕이면 가난한 이 벗을 구휼하사 구제 금융 좀 보태서 넉넉히 넣어라 부자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계좌번호가 내 전화번호야 평생 잊을 일 없지?" 사진: 인천 신포동

2021.03.28

자기 기준!

'제주 유채꽃' 사진작가: 한성 「자기 기준! 」 80평 아파트가 새가슴 내 기준으로는 운동장이다 말했지만 어떤 이 기준으로는 좁아 갑갑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선술집 시뻘겋게 구운 돼지갈비에 막걸리 한 사발이 일과인 내게 빈말이라도 세상 팔자 늘어지게 사는 양반일쎄 은근쩍 추임새로 장단 맞춰주는 위인이 있음에도 또 어떤 이가 건네는 말은 옛날에 그래도 호텔 드나들던 놈이 왜 그리 주접을 떨며 사느냐고 우스개 시비 거는 인간 하나 있긴 합니다 소싯적 아버지 말씀대로 다 형편대로 사는 거다 자기 기준! 내 꼬라지가 지금은 막걸리다 자위합니다 하긴 고층 오피스텔 지은 J 형은 상류층 제 형편을 깔고 앉아서는 평생을 움켜쥐고 사는 습성만 남아 오피스텔 관리실에서 혼자 라면 끓여 먹다 죽어 똥도 못된 것도 모자라 ..

2021.03.25

개나리꽃 한 줌

≪시집 노량진 극장≫ 2008 29쪽 「개나리꽃 한 줌」 운동 삼아 걸어 출근하는 날 아파트 뒷길 언덕배기 초등학교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봄이 되어 앉아있다 봄날 소인국에 봄 같은 아이들이 꿈틀댄다 짧은 다리에 끌고 메는 가방이 앙증맞다 웃고 재잘거리는 하얗고 뽀얀 얼굴이 봄빛이다 교문에 서서 인사 나누는 어린 여선생도 봄꽃이다 학교까지 따라 온 젊은 엄마도 봄나물이다 문득 나도 봄풀인가 하다 그 뻔뻔함에 멋 적어 씩 웃어본다 한 꼬마 봄이 병아리 같은 걸음으로 날 앞질러 쫑쫑 간다 가늘고 여린 예쁘고 귀여운 개나리꽃 한 줌 같다 그러다 문득 ‘네가 내 나이면 나는 없겠지’ 하니 봄이 사라졌다

2021.03.22

정情이란 죽일 놈

「 Boredom」 조남현 화가 《박산 시집 ‘노량진 극장’ 86쪽≫ 「정情이란 죽일 놈」 한 여자와 변치 않고 산다는 것 그거 참 지루한 일이다 한 남자와 죽자 사자 산다는 것 그것도 참 지루한 일이다 지지고 볶다 튀겨질 무렵에야 겨우 인심 좋은 정情이란 죽일 놈이 슬며시 음흉한 뱀 똬리 틀려는 듯 기어들었다 이도 저도 못하게 뻐걱 소리 나게 말라 비틀어져 헉헉거리던 숨소리조차 거세된 사랑이란 초라해진 미물을 아예 내쫓아 버렸다 굳이 애쓸 것 없는 비음鼻音을 생략 한 채로 그냥 '정情' 이란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말이다

2021.03.15

경솔한 벗 A

'콤플렉스Complex' 이광무 화백 「 경솔한 벗 A 」 후진 대학을 나온 내 꼬라지라서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벗 A와 술자리에서 큰소리 낸 적이 있다 거 말이야 너는 왜 누군가를 말 하려면 서두에 꼭 어디어디 무슨 과 나온 아무개라 얘기하는지, 나이 70이 가까워 지는데 유치하게 언젯적 학교를 아직도 들먹이냐 언젠가 B를 소개한 자리에서도 전공이 무어냐 경솔하게 물었는데 B는 대학을 안 간 벗이었다, 이 무슨 큰 무례인가? 너도 그닥 내세울만한 대학 안 나왔는데 누군가 너를 어디어디 무슨 과 나온 A라고 규정 지어 얘기하면 기분 좋겠냐 머리 득득 긁으며 머쓱해져 하는 말이 내가 그랬나 하면서도 뭐 그 까이꺼 가지고 그리 시비냐는 투다 사람을 어찌 학교 하나로 단순 평가할 수 있는지, 아마도 자기 ..

2021.03.12

한결같은 이가 좋다

'Candle Reading' 김명옥 화가 『인공지능이 지은 시 』 44쪽 「한결같은 이가 좋다」 순간의 흥취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소 가득 머문 얼굴로 다가오더니 차츰차츰 알아갈수록 사귀는 시간 무기 삼아 언제 그랬냐는 듯 매사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책임은 살살 피할 생각만 하고 제 주장만으로 핏대 세우다가 걸핏하면 혼자 삐치고 혼자 토라지고 궁지에 몰리면 어설픈 핑계로 얼버무리는 어제와 오늘이 너무 다른 이 난 오고 감이 한결같은 이가 좋다

2021.03.10

오경복

「오경복」 풍체가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똑 닮았다 노래 대신 절절한 詩로 어머니의 땅 설매산 바람 부르고는 잎새보다 먼저 핀 불갑사 꽃무릇의 성급함에 뭐가 그리 급했느냐 사람도 순리대로 살아야 하거늘 하물며 그리움에 물든 붉은 꽃무릇 너도 그렇지 아니 한가 나지막이 타이른다 꽃에게도 사람에게도 이렇게 조곤조곤 오경복은 할말은 하는 사람이다 군남천 올곧은 情氣로 성장했지만 그가 읊고 쓰는 시의 원천은 열일곱 살, 남영동 헌책방에서 만난 '기욤 아폴리네르'다 " 미라보 다리 아래 센 江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사는 게 따지고 보면 모두 사랑 타령 아닌가 기쁨도 눈물도 시 역시 그렇고 자주 소통을 해 보니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 오경복은 사랑이..

2021.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