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4월, 새벽 이야기

박산 2021. 4. 1. 08:58

 

 

박산 시집 『노량진 극장』 31쪽

「화엄사 4월, 새벽 이야기」
    
- 화엄사 기상

호텔방
옆에서 잔 벗은 부처를 만나러
새벽 4시 방문 열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나갔다 
이불 속 눈만 감고 있는 나는
시詩를 만나려고 여명黎明을 기다렸다

부처를 만나는 시간이나
시를 만나는 시간이나
다 새벽이고 아침이다
나도 어서 일어나야지 

- 새벽 새 소리

새벽어둠 
발자국 죽여 조용히 지나는 내 소리가 시끄러운가
반기는 소리가 아니지 저 소리는
숲의 적막을 깨는 내가 미워 그럴 거야
시커먼 내 그림자도 무서워 그럴 거야 
그렇다 한들 그리 시끄럽게 울지 마라
알고 보면 난 예순 넘은 너그러운 아저씨란다

- 화엄사 입구 개울가 붉은 벚꽃

붉은 늦벚꽃 몇 잎이 
새벽 개울 흐르는 소리에 슬피 떨어진다
개울 깊은 탓에
남보다 며칠 더 살았지 하며
어차피 갈 길 이라 체념하지만
그래도 서러운 건 어쩔 수 없다
화엄 계곡 먼동이 훤해질 때 
나 가는 길 곱게 비추어 주겠지

- 절집 담 이끼

절집 담에 낀 이끼는
무얼 먹고 이리 소복소복하게 살까
비 오는 날 빗물이 고작이겠지 
아니야
독경 소리 목탁 소리 먹어 그럴거야   

 

 
- 화엄사에서 화엄이란?

수행修行 만덕萬德 덕과德果 다 모르겠다
그냥 반야교 건너 각황전覺皇殿 목탁소리 듣는다

꽃잎 하나 새벽을 이기지 못해 계곡에 아프게 떨어졌다
화엄이 꽃잎지고 새잎 나는 윤회인가 한다

여명黎明은 반질반질한 목탁 위를 타고 논다 

 


- 새벽 화엄사

화엄사 절집 마당
천백 년 전부터
좋다 싫다 없이 서 있는
두 개의 동 서 5층 석탑
사이 계단 올라
각황전 들어 부처 얼굴 보니
갑자기 절이 하고 싶어졌다

내려 보고 있는 부처야
내가 불자佛子라 하건 아니라 하건 무슨 상관이랴

나 좋아 삼배 올리고
가만히 앉으니 새 소리만 들린다 
나의 침묵에 고요가 춤을 추더니
갑자기 흐르는 눈물은 무슨 조화인가
보는 이 없지만
쑥스러움에 눈가 훔치고 
부석부석 지갑 열어
만 원권 지폐 한 장
살며시 불전함에 넣는다 

 


- 동백은 떨어져도 예쁘다

화엄사 절집 뒷길
적멸보궁 오르는 길
햇살 파고든 왼 편 숲길
붉은 동백은 붉게 떨어져
헤픈 새벽을 맞고 있다 

힘없어 떨어져
너나없이 머리 풀고 가슴 헤쳐
누군가 품어 주길 바라지만
보는 나는 떨어진 너희가 다 예쁘다
다 품고 싶은 고운 여자다

한 송이 손 내밀어 
코에 한 번 대고는
키스를 해 본다

이리 아름답고 붉은 동백이여
떨어져 내 품에 든 네가 내 여자다

사진: Jannet Hong, 윤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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