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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陶情)」

「도정(陶情)」 “잘 지내시지?” 보고파 목소리라도 들으려 통화하고 싶지만 사는 게 번거로운 세상 행여 그리움도 사치라 할까 어찌 내 심사 같겠는가 넌지시 카톡으로 “?” 보냈더니 두 장의 풍경 사진과 세 장의 인물 사진에 각각의 사연을 꼼꼼히 보태 구구절절 보내온 회신 '당신도 내가 보고팠구나!' 울컥 고마운 마음으로 또 보고 또 읽다가 마치 마주 보고 있는 듯 새록새록 솟는 정을 빚었다 * 陶情: 도정차소시陶情且小詩 - 정을 빚어 다시금 시를 짓는다 남극관(1689-1714)의 시 잡제雜題 중 *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26쪽

2021.01.18

코로나로 좋은 건

◀快' 조남현 화가▶ 「코로나로 좋은 건 」 어둠 내린 겨울 저녁 퇴근길 제법 북적이는 버스 빈 좌석 찾아 앉았습니다 옆자리 얼굴 반반한 오피스 우먼은 가방은 어깨에 메고 무릎 사이 낀 꽃 그림 시장 보자기에는 파란 대파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손에 꼭 쥔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회사 얘기를 쉴 사이 없이 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속삭이듯이 하는 말이 "얘 코로나로 좋은 건 하나 있어 '媤'자 붙은 인간들 얼굴 안 보는 거야!" 어쩌나 나는? 이 기막힌 얘기를 다 들었으니 말입니다

2021.01.12

불목하니

「불목하니」 태어나길 머슴 팔자인 줄 모르고 고운 입성에 에헴 몇 번 했던 게 무슨 큰일이었다고 누군가 도끼질로 힘들게 패서 때 주는 장작불에 콧노래로 군불이나 쬐고 누군가 가마솥 쌀 일어 정성으로 지은 밥을 제 입 잘나 먹는 줄만 알고는 누군가에게는 더럽다 치워라 비질을 당연시 명령하고 살다가 알량하게 가진 밑천 여기저기로 다 새나가고 몽땅 털려서는 속내 발랑 까발려져 결국 덜렁 불알 두 쪽 남았는데도 못 살겠다 늘어놓는 신세타령에 앓는 곡소리 웃기는 소리 마라 남들 비웃는 소리가 귀로 들어 머리를 찧는다 뒤늦게 찾아온 머슴의 회한 늦었지만 어쩌겠나! 그나마 깨달았으니 다행이지 못난 자신 위한 속죄의 절집 하나 가슴에 지어 도끼질도 해야지 밥도 지어야지 비질도 해야지 비나이다 비나이다 불목하니 되어야지..

2021.01.09

『生子論』

본문 읽기 전에 『生子 이생진 시인』에 관해 잠깐 언급하고 들어가자. 일제강점기 1929년 태어나 전쟁을 겪고 1955년 교직에 있으면서 등사판을 갈아 철사로 꿰매어 낸 첫 시집 『산토끼』이래 39권의 시집과 다수의 수필 시화집을 출간해 오고 있으며 제주도 올레 1길 성산포 오정개 해안에는 이생진 시비 거리가 있다. 아흔이 넘어선 지금까지〈詩〉라는 화두를 끈질기게 붙들고 계신 「生子」는 시인이라면 시인이고 하루 15000보를 걷는 도인이라면 도인이다. 「이생진」이라는 이름 보다 「生子」라는 호칭에 행복해 하신다. 『生子論』 공자 맹자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주자는 南宋의 성리학을 퇴계 이황은 조선의 성리학을 구축했다 후학들은 퇴계를 「李子」라 했다 50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21세기 컴퓨터로 시를 쓰고 붓..

2021.01.05

당신도

사진: '상고대' 최희숙 「당신도」 - 새벽 눈 떠 보고 싶은 이 있다면 당신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꽃잎 질 때 눈물이 흐른다면 당신도 꽃 같은 사람입니다 비 맞는게 싫지 않다면 당신도 비 같은 사람입니다 푸른 하늘이 항시 내 것인 양 한다면 당신도 푸른 하늘 같은 사람입니다 붉은 노을이 주는 빛에 취한다면 당신도 붉은 노을 같은 사람입니다 달 속에 들어 꿈을 꾼다면 당신도 달 같은 사람입니다

2021.01.03

내 사랑하는 벗 月岩

사진: (좌로부터) 조철암 낭송가 이생진 시인 月岩 김경구 박산 「내 사랑하는 벗 月岩」 ㅡ 서울 개인택시 모범기사 중마고우 '월암 김경구'는 내 사랑하는 벗입니다. 말로만 모범이 아니라 그의 건실하고 근면한 삶 자체가 일설로 표현 부족할 정도로 他에 모범입니다. 이즘 보기 드문 효자 효녀 아들 딸 모두 훌륭히 키워 대기업에 입사시키고 헌신적인 부인의 내조까지 있으니, 이제는 좀 "나, 팔자 늘어졌다!" 할만도 한데, 자신은 힘 닫는데까지 평생의 직업인 운전을 성실히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최근 체력이 부쳐 휴일은 가급적 쉬어 가며 한 달에 보름 가량 즐기며 일을 합니다. 운전 틈틈이 한문 공부에 공을 들여 까다로운 글자도 척척 해석을 해 내고 트로트 음악에 일가견이 있어 이..

나의 이야기 2020.12.27

개 폼

사진: 서산 간월암에서 「개 폼」 ㅡ 시쳇말로 '가오다시', 뭐 말 한 마디 하려면 어깨에 뻥이 잔뜩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창 젊은 때는 빈정이 상해 마주하기도 싫었지만 늙어 가면서는 우선 딱하고 보기에도 이 사람 왜 저러지 하고 측은해 보일 뿐입니다. 오래 알고 지내는 A가 그렇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이 있어 누군가에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사니 어찌보면 늘그막 늘어진 팔자 임에도, 얘기 중에는 습관적으로 대화 상대인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예전 잘 나갔다는 뭐뭐하는 동창 얘기에 친분 있다는 정치인 이름을 자주 들먹입니다. 그저 변방에 쪼그려 앉아 잡문이나 끌쩍이고 있는 내 짐작으로는 문학이야 그에게 어려울 거니 그저 여행이나 막걸리 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헤어지면서 다음 만남을 진지하..

나의 이야기 2020.12.24

유튜브 공부

그림: 한천자 화가 「유튜브 공부」 ㅡ 2020 바이러스 시국이 길어지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정기적으로 얼굴 보던 분들을 못 보고 서너 번 만나는 벗들도 겨우 한 번이나 볼까 유튜브 공부를 한다 소싯적에 읽어 가물가물했던 소설을 듣고 프랑스 영국 미국 시낭송도 찾아 보고 전국 명산의 사찰 기행도 보고 세계 도보 여행을 화면 속으로 따라 걷다가 역사 강의도 듣는다 지난주는 이병주의 지리산 8부작을 시청했고 이번주는 조용헌의 암자 기행을 보는 중이다 어느 대학 강의가 이리 입맛에 맞게 버라이어티 할까 조만간 대학도 방송국도 사라질 것 같다 정말 없는 게 없는 유튜브다 바이러스 팬데믹이 준 긍정적 부분이다

2020.12.19

경호와 전셋값

「경호와 전셋값」 ㅡ "어, 배낭 멘 할아버지다!" 항시 배낭을 메고 다니는 내가 신기했던지 여섯 살 경호가 먼저 내게 건넨 말입니다 24층사는 나와 17층사는 경호와는 이렇게 엘리베이터 친구가 되었고 아파트 정원이나 동네 마트에서까지 배낭 멘 할아버지! 하고 달려와 반겨 한 번은 통꽈배기집에서 단팥 튀김 빵을 사 준 적도 있습니다 작은 신도시 이사 와서 사귄 첫 번째 친구이기도 합니다 아침 유치원 가는 시간이 나의 출근 시간과 비슷해서 자주 만났었는데 얼마 전부터 경호가 보이지 않습니다 청소 아줌마께 궁금해 물어보니 17층 이사 갔다고 내게 귀띔하며 화난 듯 덧붙이는 말이 "아파트 값이 너무 올랐으니 전세 사는 사람들 어디 견디겠어요" 지은 죄 없는 배낭 멘 할아버지는 공연히 경호에게 미안했습니다

202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