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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ror Life

「Horror Life」 딸랑거리는 동전 한 무더기가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지폐 한 장이 배꼽을 간질이는 낌새를 느껴 직감적으로 배에 힘을 주어 구겨 넣고 불리기 시작했다 두 장이 되고 세 장이 되고 제법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배보다 훨씬 더 큰 배들이 첨단의 Medical IT Tool로 배꼽에 구멍을 뚫는 것도 모자라 가슴으로 옆구리로 벤틀리 롤스로이스 마흐바흐 몇 대를 집어넣고는 Stock을 탱탱 불려 꺼억꺼억 되새김질로 소화를 시키더니 빌딩 몇 채 넣어 다시 배를 채웠다 이걸 옆에서 지켜보며 너무 부러워 죽게 생긴 내 손가락과 배꼽은 동전과 지폐를 모두 꺼내 구글에 아부하여 겨우 ‘마윈’ 표 가슴 절개 AI를 구해 많이도 말고 빌딩 딱 한 채만 집어넣으려 용을 쓰는데 삑..

2021.05.17

가고 싶은 나라

「가고 싶은 나라」 5년 만에 47년생 P 형을 만났습니다. 유럽 미주 한국 등에서 일본 종합상사 플랜트 담당으로 일했고 90년대 나와는 업무적으로 만난 사이였지만 세월의 명령으로 이제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입니다. 몇 년 전 큰 수술 후유증 탓인지 부쩍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서울 사람 상사원 출신답게 여전히 깔끔한 입성에 부드러운 대화로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재주는 여전했습니다. 위스키 소주 사케 맥주 종류 불문하고 말술을 마다하지 않았던 P 형의 지금은 그저 따라 놓은 술잔에 겨우 입술을 적시는 정도라 내심 같은 술꾼이었던 동지애가 솟구쳐 아쉽고 짠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툭 던지듯 내게 이리 묻습니다. "이 갑갑한 팬데믹이 사라지면 어디 가고 싶어요?" 순간 이태리 아말피 해변, ..

2021.05.10

사업가의 길

「사업가의 길」 기계 돌아가듯 딱딱한 업무적 만남이었지만 한 해 두 해 세 해 보낸 세월로 그의 사업 내력은 물론 가족 내력까지 하나둘 알게 됩니다 차돌 같이 작고 단단한 체구의 62년생 공장 운영하는 K 사장은 삶에 어느 누구보다 열심이고 여느 장사꾼의 한 자락 까는 얕은 술수 없는 순수한 그의 대화체는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내게도 하는 말 그대로 들립니다 삼겹살집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흔들지 않은 막걸리 병 위쪽의 맑은술만 홀짝홀짝 몇 잔 따라 마셨음에도 오늘따라 취기가 빨리 왔는지 사연 있는 아들 얘기 아내 얘기를 반복하며 전에 없이 눈이 붉게 풀어집니다 술자리 파해 헤어지는데 어려운 막내동생 두고 헤어지는 듯 알싸한 마음이 가득 들어 살며시 어깨를 안으며 어여 들어가 쉬시게나! ..

2021.05.06

휘뚜루마뚜루」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2011 우리글≫ 「휘뚜루마뚜루」 신 게 질색인 홀아비는 배만 먹었고 단 걸 싫어하는 독신녀는 사과만 먹었다 홀아비는 항상 여자가 고팠다 독신녀는 남자가 필요했다 어쩌다 둘이 눈이 맞았다 혀도 맞았다 신 게 별 것이 아니었고 단 거 또한 별 게 아니었다 사과 맛들인 홀아비와 배 맛들인 독신녀는 휘뚜루마뚜루 걸신들렸다 맵고 쓰지 않는 한 둘은 지금 행복하다 ※ 휘뚜루마뚜루 :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 치우는 모양

2021.05.04

행복한 낙원

「행복한 낙원」 자연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가끔 봅니다. 사연을 들어보면 세상 사는 일에 지쳐 선택한 순수 자연에 의탁해 살아가는 쉽지 않은 그들의 삶의 고뇌가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자연인에게는 老莊의 玄學의 경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단어에 으뜸은 행복하다, 편하다, 자유롭다, 여기가 나만의 낙원이다 라는 자기만족의 말입니다. 일맥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각자가 추구하는 만족의 정도는 다 다르니 말입니다. 주제를 좀 벗어나는 듯한 말입니다만, 아내가 오래전에 실버 잡지사(노인 잡지) 기자 노릇할 때 당시 수도권에 위치한 고급 실버타운을 취재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상시 대기 중이고 삼시 세끼가 훌륭한 자체 식당에서 제공되니 밥해 먹을 일도 없습니다. 여기 입주..

나의 이야기 2021.04.29

옷 잘 입는 사람이 좋다

「옷 잘 입는 사람이 좋다」 1960년대 태극기 성조기가 그려진 원조 밀가루 포대 배급 받아 너나 할 것 없이 겨우 입에 풀칠하던 어린 시절 고물상 집 영수 형이 폼나는 로마이 구제품 쎄비로를 쪽 빼입고 동네 휘젓고 다니면 혀를 끌끌 차며 어른들 하시는 말씀이 저눔은 부모 등골 빼먹는 놈이야 저리 뽀다구나 잡고 다니면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형 참 멋쟁이였는데 2021년 법적 노인임에도 벗 청노 정주 자산은 쪽 곧은 몸매에 철철이 붉고 노랗고 파란 옷들을 패셔니스트 스타 저리 가라 잘 챙겨 입고 페드로나 헌팅캡을 즐겨 쓰고는 고품격 화려한 신발로 품위를 더하니 영화배우가 따로 없다 다행스럽게도 가난이 추억이 된 나라에서 입에 풀칠 걱정 없이 그럭저럭 장년을 살고 있어 감사하다 단지..

2021.04.26

거문도에서 날아온 시

박산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2015 황금알》 「거문도에서 날아온 시」 '등대의 말은 시다' - 이생진 오른쪽엔 하얀 등대 왼쪽엔 빨간 등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멀쩡한 날 하루 종일 마주 서서 말없이 지내기란 답답하겠다 오른쪽엔 하얀 등대 왼쪽엔 빨간 등대 흰 등대에선 흰 손수건이 나오고 빨간 등대에선 빨간 손수건이 나올 것 같다 오늘은 그들 대신에 내가 서 있고 싶다 여의도 어느 빌딩 속에 시가 날아들었다 D증권 초보 애널리스트 스물여덟 먹은 김수영 양은 한강 공원이 내려 보이는 19층 화장실에 앉아 이생진의 시집 ‘거문도’를 읽다가 물 내리는 소리가 파도 인양 하였다 여의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속의 거문도다 63빌딩 앞 흰 등대에선 흰 휴지가 나오고 밤섬..

2021.04.19

영화 미나리

「영화 미나리」 1990년대 초 미국 출장 중 20일 넘게 머스키곤 뉴욕 디트로이트의 공장 방문에 심신이 지쳤을 무렵 시카고 사시는 막내 이모 댁에 가서 2박 3일을 묵었다. 어린 시절 이모는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큰누나 같은 친밀감이 있는 사이였다. 이모부가 사업에 실패해 1970년대 초 아이 둘 데리고 미국 이민을 떠났었다. 나 역시 20여 년 만의 반가운 해후였다. 이모는 내게 여러 날 출장 여독이 클 터이니 미시건湖와 유서 깊은 시카고 시내 드라이브 관광을 하자 했으나 나는 이모 가족이 실제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 운영하는 가게에 나가 일을 돕겠다고 자청했다. 시카고 슬럼가에 바(선술집)와 리꿔 스토아(창고형 술 판매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자가 건물이니 그만하면..

나의 이야기 2021.04.15

햇살 한 줌

햇살 한 줌 소같이 우직한 일꾼 우리 회사 尹 사장이 내년 함께 회갑 맞을 죽마고우들과 유럽 여행을 하려는데 인원은 몇 명이고 모아놓은 예산은 얼마고 하며 동구권이 좋을까요 서구권이 좋을까요 물어 다수가 유럽이 초행이라니 프랑스 이태리가 좋겠다 했는데,,,. 팬데믹의 이 엄중한 시국에 엄두도 못 내는 단체 유럽 여행 얘기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동시에 그렇지 내년에야 이 지독한 바이러스란 놈이 물러가겠지 생각하니 폭우 그친 하늘 저만치 보이는 햇살 같은 한 줌 희망이 보였다

202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