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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시집 《노량진 극장 2008, 우리글≫ 「7번 국도」 부산까지 안 내려가도 좋다 함경북도 온성까지 안 올라가도 좋다 그냥 동해바다 속초 강릉 주문진 삼척 울진 그 근방 은모래 백사장 소나무 숲 굽이굽이 품은 도로 수평선 붙은 하늘 항시 열려 있고 그 하늘 아래 산맥이 바다 향한 새벽 기지개 던지는 길 밉고 하기 싫은 것 여기 모두 던지라고 넉넉한 바다 골치 아픈 생각 이젠 그만 하라고 일직一直이룬 수평선 지금의 내 고통 보다 누가 더 아픈가 비추어 보라고 선 등대 좋은 꿈꾸며 한숨 푹 자라고 지은 꽃 같은 펜션 사는 것도 7번 국도만 같았으면 참 좋겠다

2021.08.30

은밀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은밀」 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아파트먼트에서 거울 속의 마네킹처럼 보이며 살고 싶지는 않다 정직하지 않은 삶이라고 욕해도 좋다 나는 수족관 어류가 아니다 간혹은 갈색 커튼이 드리워진 침침한 스탠드 불빛 아래 올 사람 막아 문 걸어 잠그고 침묵을 가장한 채로 찌그러진 치즈 한 무더기에 제멋대로 굽은 윙글스 몇 조각과 버번위스키 한 병만으로 한 며칠 그냥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게으르고 싶다. 지나친 고요가 싫증이 날라치면 발가락으로 누르면 켜지는 그런 낡은 전축을 가까이에 두고 아무도 들여다 볼 수없는 은밀한 나만이 소유 할 수 있는 그 나태를 위하여 세상에다가는 “나 그냥 며칠 죽었다" 통보하고 그러다 원하여 꿈꾸길 세상살이 한 몇 번은 죽었다 ..

2021.08.26

소풍 끝낸 풍경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소풍 끝낸 풍경」 불알이 어찌 생겼는지조차 잘 아는 친구가 죽어 장례식에 갔어요 죽은 이유는 말 안 할래요 병으로 죽었건 무엇으로 죽었건 소풍 끝낸 건 다 마찬가지니까요 좀 더 같이 놀지 못하고 성질 급해 먼저 간 빙신 같은 놈 말해 더 무엇 하겠어요 그래도 살아생전 오랜 세월 죽여 죽어라 같이 다닌 정리情理가 그게 아니거든요 문상객이 많던 적던 조화가 많던 적던 부조금이 많던 적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같이 놀던 친구들이야 쓴 소주 한 잔에 눈물 고인 짠한 마음으로 ‘잘 가라’ 할 밖에 그런데 말입니다 화장터 불구덩이 방향으로 자리 잡은 방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검은 리본 두른 내 친구 놈 얼굴 사진은 제법 근엄한 척 합니다 진즉에 혼 빠진 관 속 제 육..

2021.08.23

손재주

'박산' 목석애 화백 손재주 ㅡ 삽자루 곡괭이자루는 물론 망치 스패너 하나 제대로 잡아 본 일 없지만 전장품 크레인 장사를 오래 했으니 그나마 전기 기계 엔지니어링을 마케팅적 수박 겉핥기로 경험했을 뿐이다 이러니 뭔가를 스스로 조물락거리며 만들고 고치는 일에는 젬병이다 하다못해 못질 하나를 해도 태가 안 나고 30년 넘은 컴퓨터 얼리어답터임에도 간단한 오류 발생에 당황하기 일쑤다 지인이 택배로 보내온 청송 사과 박스를 번쩍 드는 순간 옆구리가 시큰하며 담이 들었다 아픈 부위를 여기저기 손으로 짚어 가며 파스 두 장을 겨우 붙였다 다음 날 아침 새 파스를 붙이려 아내에게 등을 내밀었는데 "아니 아무리 손재주가 없어도 파스조차 이리 얼기설기 붙여요!"

2021.08.19

Who am I ?

ㅡ 'Woman Player After Olympic Games' 이광무 화백 ㅡ 《인사島 무크지 진흠모 이야기 7 중, 2021》 [ Who am I? ] 막걸리 자리에서 “마셔! 마셔! 사는 게 뭐 있나 도사 흉내나 이렇게 내며 한평생 이리 살다 가는 거지”하며 유행가 가사처럼 쉽게 읊조리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볼수록 '사는 게 뭔지….?'는 인생 거대 담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예순 넘은 지 오랜 법적 장년에게는 말입니다. 과연 나는 뭐 하고 살았고 뭣을 건졌고 뭣이 남았나. Who am I? 어머니의 바다에 아버지가 쏜 화살 요행僥倖한 파문波紋의 꼴이 찌질이 세일즈맨 실패한 장사꾼 삼류 시인 도대체 나는 누굽니까 보잘것없는 나의 과거 완료형에 'Who am I?'라는 짧은 시로 자신에게 진지하..

나의 이야기 2021.08.14

광음光陰

게리 번트(Gary Bunt, 1957~) 영국 켄트주 출신 화가, 시인. 음악 밴드 기타리스트, 건설현장 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 전전. 마약과 알코올 중독 등을 겪었다. 자기치료와 성찰의 ‘사색적 여정’을 그림으로 그린다. 시집《무야의 푸른 샛별, 2015 황금알》 광음光陰 ㅡ 습濕한 은둔 속 꿈틀대던 작은 벌레 한 마리 용케도 새의 먹이가 되지 않고 몸통에 날개를 달았다 숲을 떠났다 아집我執에 취해 만든 목표 허공에서 높이 날 생각만 했다 억지웃음에 호들갑을 떨었고 내가 벌레였음을 잊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날개 힘 빠지던 무렵 잦은 눈물을 흘릴 그때다 회한悔恨 따위의 자학의 습관들 날갯짓이 슬프다 가만가만 다시 기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백랍의 날개보다는 퇴화退化가 더 좋다 난 이카로스가 아니다..

2021.08.11

권필과 나

권필과 나 ㅡ 조선의 시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권필權韠:1569(선조 2)~1612(광해군 4)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실속 없이 시 씁네 하다가 벼슬자리하나 못한 위인이, 공연히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풍자했다가 괘씸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가는 길에, 친구들이 벌인 동대문 밖 이별酒 자리에서 막걸리를 들이켜다 곤장독으로 죽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불쌍한 인물인가 하는 생각이고 가만히 逆으로 생각하면, 詩로 떠들다 실속 없이 죽은 권필이나 평생을 돈벌이 좀 하겠다고 꿈만 꾸다 막 내린 내 처지와도 일맥상통 비슷하다는 동병상련으로 그런가 합니다. 그의 널리 알려진 시 희롱할 '희' 자를 쓴 '戱題' 라는 제목부터 그의 사람 됨됨이가 실익 없음이 느껴집니다. 이 시에서 두 문장 詩能遣悶時拈..

나의 이야기 2021.08.08

웃다

김명옥 화가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웃다 ㅡ 한강 다리 중간 즈음 노을이 붉게 타는 방향 난간을 잡고 어떤 사내 하나가 큰소리로 웃고 있다 지나가는 차들이 힐금거렸다 택시 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 저런 꼴통 같으니 만만한 게 아래 흐르는 강물이니 제 잘난 맛에 저러지 ” 트럭 탄 프로이드가 말했다 “ 그래 웃어라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면 다리위서 저리 웃겠나 더 크게 웃어라 울지만 말고 ” 버스 탄 칸트가 말했다 “ 뭔가 생각지도 않은 대박이 터졌구만 틀림없어 로또가 터졌어 ” 자가용 탄 베르그송이 말했다 “ 못 볼 걸 봤어 틀림없이 저 친구 빚쟁이가 죽었나? ” 노을이 저물어 가는데도 사내는 계속 웃고 있다 웃다 그리고 웃다 웃다 그리고 ..

2021.08.05

젓가락질은 인격이다

☆ '舞姬' Drawn by 조남현 ☆ 젓가락질은 인격이다 ㅡ 무언가를 국내외에 팔기 위한 직업을 평생했던 사람으로서 내국인은 물론 동ㆍ서양 사람들과도 식사나 술자리를 자주 해 오고 살았다. 일전에 우리 회사 윤 사장과 지방 도시에 위치한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내 또래의 A 사장을 만나러 갔다. 나 역시 구면인 분이었는데 점심으로 그 지방에서는 꽤 알아주는 시설 좋은 고깃집에서 갈비탕을 먹었다. 그런데 마주 앉은 A 사장의 젓가락질을 보고는 내심 당황했다. 엄지 검지 중지 사이로 젓가락을 가볍게 잡고 반찬을 집는 게 상식인데 젓가락 두 개를 움켜쥐고 숫가락을 덧대어 갈빗살을 벗겨 내는 모습에, 보는 내가 아슬아슬 불안해질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식사 중에 내가 묻는 말 이외에는 일체의 대화가 없었다. 후..

나의 이야기 202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