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끝낸 풍경

박산 2021. 8. 23. 14:26

◀ 共生共死 ▶김명옥 화가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소풍 끝낸 풍경」

 

불알이 어찌 생겼는지조차 잘 아는 친구가 죽어

장례식에 갔어요

죽은 이유는 말 안 할래요

병으로 죽었건 무엇으로 죽었건

소풍 끝낸 건 다 마찬가지니까요

 

좀 더 같이 놀지 못하고 성질 급해 먼저 간 빙신 같은 놈

말해 더 무엇 하겠어요

그래도 살아생전 오랜 세월 죽여

죽어라 같이 다닌 정리情理

그게 아니거든요

 

문상객이 많던 적던

조화가 많던 적던

부조금이 많던 적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같이 놀던 친구들이야 쓴 소주 한 잔에

눈물 고인 짠한 마음으로 잘 가라할 밖에

 

그런데 말입니다

화장터 불구덩이 방향으로 자리 잡은 방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검은 리본 두른

내 친구 놈 얼굴 사진은

제법 근엄한 척 합니다

진즉에 혼 빠진 관 속 제 육신은 바로 앞에서 활활 태워지고 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금방이라도 말 걸어 올 것 같은 친하고 익숙한 얼굴

새삼 눈 맞추어 쳐다보았지요

마음속으로 한 번 더 이놈아! 잘 가라하는데

갑자기 낄낄거리며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는 거에요

그 영정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거 에요

산 놈이 거긴 왜 들어가 있는지

 

그것도 모자라 들어있는 내 얼굴도

제법 근엄한 척 하는 게

내가 날 더러 쟤가 왜 저러지했지만

검은 리본이 제법 어울리기까지 하는 거에요

헛헛한 웃음이 사라지는 순간

이렇게 죽는 거와 친해지는구나!’ 깨달았지요

 

그래서 화장터 구경도 할 만해요

어디 안 죽는 사람 있나요

소풍 끝낸 친구 덕에 별 경험을 다 해 보았지요

새삼 사는 게 고맙지요

 

'' 카테고리의 다른 글

7번 국도  (0) 2021.08.30
은밀  (0) 2021.08.26
손재주  (0) 2021.08.19
산처럼 쌓이는 그리움들  (0) 2021.08.16
광음光陰  (0) 2021.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