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

박산 2021. 8. 26. 13:24

<윤영호 사진첩 중 'Thoughtful Person'>.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은밀」

 

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아파트먼트에서

거울 속의 마네킹처럼 보이며 살고 싶지는 않다

정직하지 않은 삶이라고 욕해도 좋다

나는 수족관 어류가 아니다

 

간혹은 갈색 커튼이 드리워진

침침한 스탠드 불빛 아래

올 사람 막아 문 걸어 잠그고 침묵을 가장한 채로

찌그러진 치즈 한 무더기에

제멋대로 굽은 윙글스 몇 조각과

버번위스키 한 병만으로

한 며칠 그냥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게으르고 싶다.

 

지나친 고요가 싫증이 날라치면

발가락으로 누르면 켜지는

그런 낡은 전축을 가까이에 두고

아무도 들여다 볼 수없는 은밀한

나만이 소유 할 수 있는 그 나태를 위하여

세상에다가는

나 그냥 며칠 죽었다" 통보하고

그러다 원하여 꿈꾸길

세상살이 한 몇 번은 죽었다 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동안의 의식도 없고

무명無明의 기억이 사라진 그런 순간처럼

다시 태어나길 한 두어 차례만 반복하여 보아도

모자라 질겁하여 그렇게

으로 추구했던 것들에 대한 반성과

소유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감사의 눈물지을 터인데

 

 

그러다 다시 죽어질 날을 위하여 겸허히

몇 장의 편지를 쓰고

그 몇 장의 끝에는 은밀히 사랑했던

지상의 연인을 위한 연서를 쓰면서

마무리 문장 뒤에 찍은 "!" 표 하나에

부풀어 오를 그녀의 유방을 생각할 텐데

 

눈떠 다시 살아온 기억일지라도

미로를 찾아 헤매는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어

아직도 그 음침한 은밀함을 추구한다면

 

편한 날 하루 낚아

따라오는 이 없고

앞서가는 이 없는 지리산 한 자락

구례 지나 '왕시루봉 - 늦은 목제길'

물만 가득 든 배낭 하나 짊어지고

어둠이 마중 나온 문비우동을 오르면 어떠할까

나의 그 은밀함을 지켜 줄 수만 있다면

 

 

:

 

그가 누군 인지를 알듯이 내가 누구인지를 너무 잘 아는 타인이 두려울 때가 있다

잘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근본이 진실치 못한 퇴폐한 나의 한구석에 또 다른

나는 나를 이방인인척 내버려 두려하는데, 이미 다 까발려진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까지 누구의 아비이며 어떤 일을 하는 인간인지조차도 현실은 유리 속을

노는 나를 들여다보듯이 꿰뚫어 보고 있으니…‥ 나는 어디론가 은밀한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찾아야하겠다. 그 연정의 letter를 위해서라도.

(2006 가을 지리산 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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