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권필과 나

박산 2021. 8. 8. 09:07

삼척 죽서루

 

권필과 나 ㅡ

조선의 시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권필權韠:1569(선조 2)~1612(광해군 4)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실속 없이 시 씁네 하다가 벼슬자리하나 못한 위인이, 공연히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풍자했다가 괘씸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가는 길에, 친구들이 벌인 동대문 밖 이별酒 자리에서 막걸리를 들이켜다 곤장독으로 죽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불쌍한 인물인가 하는 생각이고 가만히 逆으로 생각하면, 詩로 떠들다 실속 없이 죽은 권필이나 평생을 돈벌이 좀 하겠다고 꿈만 꾸다 막 내린 내 처지와도 일맥상통 비슷하다는 동병상련으로 그런가 합니다.

그의 널리 알려진 시 희롱할 '희' 자를 쓴 '戱題' 라는 제목부터 그의 사람 됨됨이가 실익 없음이 느껴집니다. 이 시에서 두 문장 詩能遣悶時拈筆(시는 고민 걷어가 종종 붓을 잡았고) 酒爲澆胸屢擧觥(술은 가슴 적셔 자주 잔을 들었지 ). 이 얼마나 자위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시입니까, 가족을 책임지고 가문의 영광을 도모해야 할 조선의 양반이 안방에 앉아 줄창 막걸리나 마시면서 시를 지으며 이런 식의 자기 합리화나 꾀하고 있으니 당시 권필의 부모와 그의 아내 자식들이 생각하면 분통 터질 일입니다. 하지만 시를 쓰는 내 입장에서는 시를 쓴다는 핑계로는 이보다 더 시적으로 적확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즘으로 말하자면 서울시청에 다니는 친구가 권필의 백수를 안타깝게 여겨, 어이 친구! 우리 부서에 별정직 자리가 하나 비어 자네를 천거할 터이니 와서 일을 하게! 하니 이 답답하고 꼬장꼬장한 위인의 말이,
내 집에 읽을 책이 충분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나 홀로 마음 풀기 좋고 부자는 아니라도 매양 막걸리 사 먹을 형편은 되니 이를 시에 버무리면 장차 늙어 나이 먹음도 잊을 수 있는데, 이런 이치도 모르는 자들이 백수니 뭐니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부질 없지 않은가? 기껏 친구를 위해 권했던 벗에게 이렇게 무안을 주었다 하니 참 그의 시에 대한 충정은 목숨과도 같다 할 정도 아니었을까요.

타고난 그의 경직적인 시인 기질은 불의를 좌시하지 못했고 보이는 세상일에도 氷炭不相容 얼음과 불의 불화합처럼 매사 부딪치는 형국이었습니다.

이즘 보잘것없이 쇠락한 우리의 詩場을 보면 어디서 나랏돈 몇 푼 시로 쥐어 준다하면 뭐뭐 하는 단체를 만들어 서로 품앗이로 밀고 끌어 주며 아주 다정스럽게 의리를 지켜가며 다정도 병인 양하며 지내는 속 빈 강정 같은 자칭 시인들을 보면 참 시가 영혼 잃은 구멍 숭숭 뚫린 엿판 싸구려 엿 신세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재야의 숨은 고수들이 쓰고 있는 현대판 권필의 미발표 시들이 어디선가 숨 쉬고 있을 거란 믿음이고, 또 그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사실이고 최소한 지금은 곤장독으로 맞아 죽지는 않을 거라는 현실에 마음은 놓입니다.

시를 쓰는 동안 고민 잊게 해 주니 쓰고, 가슴 적셔주니 마시는 막걸리가 있음에, 나는 권필보다는 행복하다는 생각입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Ignorance of Wine  (0) 2021.09.02
Who am I ?  (0) 2021.08.14
젓가락질은 인격이다  (0) 2021.08.01
참을성 없는 어른  (0) 2021.07.23
영화 '인턴'  (0) 202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