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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nience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Convenience 누가 돈 낼까 전전긍긍하여 먹는 밥 한 끼 보다는 냉수에 밥 말아 김치 찢어 씹는 게 맛있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술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마시느니 냉수 한 사발이 시원 합니다 사사건건 캐물어 대답하기 싫은 이랑 백날 앉아 있느니 빈방에 누워 코 후비는 게 더 편 합니다 가기 싫은데 억지로 체면 생각해 갔다가 김새는 것 보다는 조금 미안하더라도 안가는 게 머릿속이 가볍습니다 순간적 욕정에 눌린 정사情事 후 허겁지겁 속옷 찾아 입는 것 보다는 달콤한 입맞춤 후 가벼운 포옹이 훨씬 상큼 합니다

2021.10.05

간서看書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황금알》 「간서看書」 몇 푼 벌자고 그리 애를 썼는데 세월에 치인 오줌발은 시들어 가고 어항 속 붕어 되어 입만 벙긋벙긋 버리지 못하는 미련만 두어 움큼 큰 나무 드리운 창가에 누워 손에 책 쥐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보다 못한 책이 나를 읽으려는 순간 창밖 한 무리 참새 떼가 찧고 까부는데 몇 푼의 명리名利가 아옹다옹 저 같음을 깨닫고 기약을 두지 않은 책장을 넘긴다 * 이민성(1570-1629)의 齊居卽事를 새벽 읽다가

2021.09.28

좋아서 살아가는 날

좋아서 살아가는 날 ㅡ 뭐뭐 생각하고 얘기하다 불쑥 뿔나는 일이 있어도 빨갛게 볶은 돼지불고기 지글지글 두부 부침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면 언제 그랬었냐는 듯 시나브로 풀어져서 평생 날 짓누르고 있는 경제에 까짓 케인즈가 뭐고 아담 스미스가 뭔데... 중얼거리다가 해질녁 예쁘기만 한 붉은 노을 향해 까불지 말아라 낮술 한잔 찌그렸다 왜 꼽냐 잘 보면 나 괜찮은 놈 아닌가 이유 없이 일방 눈쌀 주정을 부리는 처지이지만 이런 날은 정말 좋아서 살아가는 날이다

2021.09.23

귀향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귀향 - 머릿속 지도에서 사라졌다 있긴 있었는데… 분명 내 고향이 실망으로 내쉰 한숨 접으려는데 어렴풋이 나타났다 강 넘어오는 기차 소리 콩나물국 끓는 냄새 넘치는 부엌 나는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있다 참새 소리 두부 장사 종소리 길거리 사람들이 개미처럼 하나둘 나타났다 표정이 없고 색깔은 온통 회색이다 나는 마당 절구통 옆에서 아령을 들고 있다 우리 집 양철 대문 위를 등나무 줄기가 감고 있다 기와지붕 위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골목에 동민이 누나가 교복을 입고 나왔다 감나무 집 솜틀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헛기침 소리가 익숙하다 아버지, 아버지다 갑자기 배에 힘이 들어갔다 사육신묘지 앞 목욕탕 욕조에서 현인 선생이 신라의 달밤을 노래하는데 노래하곤 ..

2021.09.19

인도 눔이

시집 《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인도 눔이 일찍이 인도 장사하다 별의별 인간들 다 만나 떼인 돈이 꽤나 됩니다 라자스탄주와 장사할 때도 구자라트주와 장사할 때도 그 나물에 그 밥 아들도 사기 치고 며느리도 사기 치는 온 가족 똘똘 뭉쳐 사기 치는 그런 눔들에 그런 회사였지요 몇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쫀쫀한 이 장사꾼은 떼인 돈만 생각하면 아직도 약이 오르는데 며칠 전 일입니다 북창동 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나오다 한화 빌딩 앞 벤치에 앉아 통화 중인데 딱 봐도 인도 사람인 줄 알고도 남을 한 삼십은 넘어 먹었을 유들유들하게 생긴 녀석이 정중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앉더니 인도식 특유의 또르르 구르는 영어로 내 얼굴에 좋은 기운이 보인다더니 내 눈과 코 사이를 가리키며 세상에 이렇게 좋을 ..

2021.09.13

문패

문패- 1964년 노량진역 앞 야트막한 산등성이 우리 동네 열심히 미장일 다니시던 경배 아버지가 고만고만한 집들이 올망졸망 붙어 있는 골목 어귀에 코딱지만 한 방 두 칸에 쪽마루 겸 부엌 있는 무허가 집 한 채를 사서 한문으로 쓰인 나무 문패를 녹슨 철대문에 걸고는 고사떡에 돼지머리 삶아 아랫집 윗집 옆집 다 불러 "진천 촌놈이 서울 하늘 아래 내 이름 석 자 문패 걸었으니 이제 부러울 게 없씨유!" 세상 다 얻은 표정으로 기뻐하였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뀐21세기 일흔 코앞 변두리 후진 아파트 사는 나는 이름 석 자 문패도 못 걸고 사는 신세다 말 잘 섞고 인사 잘해 알고 지내는 한 쉰 먹었을 우리 동 남성 청소원은 아침이면 환하게 웃음으로 말을 건네는데 볼 때마다“사장님!”이라고불러 큰맘 먹고“나 사장 ..

2021.09.09

Ignorance of Wine

Ignorance of Wine ㅡ 1992년 독일 출장을 처음 갔다. 관광지로 유명한 로텐부르크 인근 쿤젤자우라는 작은 동네에 공장과 회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에서는 나를 위한 저녁 만찬으로 중세 Castle의 일부 건물을 개조한 천정이 높은 고풍스런 식당으로 안내했다. 동남아를 주로 다녔던 세일즈맨이 유럽 식사 문화를 처음 접하는 순간 처음 만난 게 와인 문화였다. 당시만 해도 와인이란 말 대신에, 어린 시절 집 뒤뜰에 포도 넝쿨이 있어 병에 포도를 넣어두면 자연 발효가 된 포도주란 단어가 친숙할 때다. 턱수염이 멋진 나비넥타이 차림의 웨이터가, 열 명 정도가 앉아 있는 테이블 호스트 앞에 와인을 들고 오는 걸로 시작하는데, 린넨에 싸인 와인 병의 라벨을 호스트에게 보여주며 주문하신 와인이 맞는지 확..

나의 이야기 202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