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눔이

박산 2021. 9. 13. 11:13

인도 향신료 가게

 

시집 《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인도 눔이

 

 

일찍이 인도 장사하다

별의별 인간들 다 만나

떼인 돈이 꽤나 됩니다

 

라자스탄주와 장사할 때도

구자라트주와 장사할 때도

그 나물에 그 밥

아들도 사기 치고

며느리도 사기 치는

온 가족 똘똘 뭉쳐 사기 치는

그런 눔들에 그런 회사였지요

 

몇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쫀쫀한 이 장사꾼은

떼인 돈만 생각하면 아직도 약이 오르는데

 

며칠 전 일입니다

북창동 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나오다

한화 빌딩 앞 벤치에 앉아 통화 중인데

딱 봐도 인도 사람인 줄 알고도 남을

한 삼십은 넘어 먹었을 유들유들하게 생긴 녀석이

정중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앉더니

인도식 특유의 또르르 구르는 영어로

내 얼굴에 좋은 기운이 보인다더니

내 눈과 코 사이를 가리키며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감탄사를 연신 내뱉습니다

올 가기 전 1112월 중에

엄청난 행운이 내게 온답니다

얼마간의 장황설 끝에

영어가 된다는 확신이 섰는지

내 손을 슬쩍 쥐며 쫙 펴보랍니다

손금을 요리조리 훑어보고는

줄 하나하나 돈줄 생명줄 다 좋답니다

 

습자지 같은 작은 종이의 쪽지를

꼬깃꼬깃 접어 내 손에 꼭 쥐여주더니

 

몇 살이냐

좋아하는 꽃이 무어냐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

건강 돈 중 어떤 게 더 중요하냐 등등을 묻더니

깨알같이 종이에 적습니다

 

그러더니 내가 쥐고 있는 손에

콧김 입김을 불어넣으라 하더니 쪽지를 펴보라 합니다

 

놀랍게도 내가 손에 쥐고 말했던 사항이

그대로 다 적혀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이와 유사한 행위를 되풀이하다가

TV 마술로 많이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녀석이 무슨 수작일까 슬슬 의심이 들어

 

너 원하는 게 뭐냐

단도직입적으로 두세 번을 묻자

그제야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이 들고 있던 작은 지갑을 펼치니

거기엔 자신의 영적 스승이라는 구루의 사진이

오만 원짜리 지폐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나의 행운과 그의 영적 가피력을 위하여

도네이션을 해야 한답니다

 

짐작이야 했었지만

이 눔이 여기까지 와서 사기를 치나

순간 어처구니도 없었지만

만약 내가 인도의 델리나 뭄바이 한복판에서

이런 꼴을 당했다면

아마도 그눔들 뻔뻔한 위협 속에서 꼼짝없이

몇 푼 뺏기고 말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 냉랭해지고

내 나라에서까지 이런 눔에게 ...

쌀쌀맞게 꼬나보며 눈도 좀 찌푸리고

입가 미소도 싹 지워버리고는

 

내가 왜 네 눔의 구루에게 도네이션을 해야 하는데

너 여기서 자꾸 이런 사기 치면 경찰서 데리고 간다

 

시종일관 느물느물하던 이눔

꽁지 빠지게 지하철역 계단으로 사라졌습니다

 

(2014년 가을 북창동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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