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28

눈 덮인 숲속 온천 이야기

눈 덮인 숲속 온천 이야기 ㅡ 길 양옆 눈이 내 키보다 더 쌓였다 그럼에도 눈을 치워 널찍한 길을 냈다 그런 산속 길을 미니버스로 올라 산장호텔에서 잤다 다시 또 눈 내리는 아침 무릎 장화를 신고 푹푹 빠지는 숲속 눈길을 헤쳐 나가는데 소나무 삼나무 등에 걸쳤던 눈덩이들이 냉랭으로 반기며 퍽퍽 내 머리로 떨어진다 얼마를 내려가니 뿌연 온천 김 서림이 보인다 미끄러질까 발걸음 조심조심 물가로 내려가니 한 서너 평이나 될까 천연 온천이다 손을 살짝 담가보니 제법 뜨겁다 발가벗은 사내 하나가 들어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여긴 '누드'라고 이미 알고 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성이 없다 그래도...하다가 언제 또 이 고립된 산속 눈 숲에서 발가벗겠나 하고는 다 벗었다 하이! 일본 말을 못하는 나는 그냥 짧은 인사만..

2023.01.16

겨울 숲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겨울 숲 - 바람은 어둠 따윈 개의치 않는다 볼때기 시리게 쌩쌩 때리는데 숲이 “잘 있었냐?” 묻는다 그 길고 추운 고독 알 것도 같고 그냥 휙 지나치기 미안해 그래 너는 어때 하고는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는데 황색 점퍼 입은 노인이 지팡이 짚고 낙엽 부스러기를 발끝에 질질 끌고 지나간다 햇빛은 어두운 숲을 포기하지 않고 하늘 향해 벌거벗은 나무 꼭대기에서 소리 없이 웃으며 서성인다 빨간 바지 파란 파커가 어울리는 여인이 검은 선글라스로 어둠을 더하면서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스쳐 지나간다 숲은 저 여인하고도 말하고 싶어 나무 몇 그루를 흔든다 숲을 빠져나왔지만 노인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다 돌아본 숲이 표정 없이 잘 가라 손짓이다 바람은 여전히 차다

2023.01.12

미남열전美男列傳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미남열전美男列傳 - 어린아이 취미치곤 고상한 극장가는 걸 좋아했던 솜털 보송보송했던 시절 예쁜 여자보다는 잘생긴 남자가 멋졌다 대머리 노들이발관 이발사 들창코 만화가게 주인 실눈이 로마양복점 재단사 배불뚝이 역전사진관 사진쟁이 합죽이 솜틀집 아저씨 코흘리개 국영이 얼굴 버짐 하얗게 뜬 재선이 까만 피부라서 별명이 ‘깜상’인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형 등등 노량진역 앞 노량진극장 끼고 들어와 쭉 가면 만년고개 넘고 오른쪽 틀면 서낭당고개 넘는 우리 동네는 못난이들 집합소였다 근엄한 대통령 얼굴도 솔직히 무 꼭지 같았다 그래도 영화 속 총 차고 말 타고 삐딱하게 시가Cigar 씹는 존 웨인이 잘 생겼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그랬지만 뾰족뾰족한 제임스 딘은 별로였..

2023.01.09

갓밝이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우리글 2011》 갓밝이- 마당 자동차 시동 걸리는 소리가 달이 사라지는 것을 재촉했다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하늘 구름 기지개가 촉촉했다 화단 이슬 잔뜩 머금은 잎새 하나 파르르 떠는 모습 흐릿하게 보였다 고양이가 내는 음전한 소리에 새들은 긴장했다 바쁠 게 없는 게으른 먼동 아파트 꼭대기 유리창에 붙었다 부지런한 자 나지막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 소리 저만치 들렸다 * 갓밝이: 새벽 태양이 떠오르는 시점

2023.01.02

인사동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 254

【인사동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 254】 2022년 12월 30일 7시(매달 마지막 금요일) 종로구 인사동길52번지 인사14길 詩/歌/演(02) 720 6264 쥔장:김영희010 2820 3090 /이춘우010 7773 1579 1호선 종각역→안국동 방향700m 3호선 안국역→종로 방향400m 북한산: 황덕희 북쪽 외곽에 우뚝 솟은 채 3개의 봉우리를 안고 있는 북한산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에 서면 하늘이 몸을 휘감고 바람이 먼저 말을 건넨다 언제였더라 기억 저편 웅크리고 앉아 삶을 지탱해온 이야기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줄 건가요? …… 말을 잇지 못하고 먼 산만을 힘없이 바라보시던 아버지 등은 북한산만큼이나 조용했고 북한산만큼이나 거대했다 북한산에 오르면 바람이 먼저 반겨 준다 * 진흠모/시인/ 낭송가 【인..

2022.12.24

당신도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당신도 - 새벽 눈 떠 보고 싶은 이 있다면 당신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꽃잎 질 때 눈물이 흐른다면 당신도 꽃 같은 사람입니다 비 맞는 게 싫지 않다면 당신도 비 같은 사람입니다 푸른 하늘이 항시 내 것 인양 한다면 당신도 푸른 하늘같은 사람입니다 붉은 노을이 주는 빛에 취한다면 당신도 붉은 노을 같은 사람입니다 달 속에 들어 꿈을 꾼다면 당신도 달 같은 사람입니다

2022.12.21

부러운 놈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부러운 놈 - 잘잘 끓는 아랫목에 누워 마누라 엉덩이 통통 두드리다 조물조물 허리라도 안을라치면 실쭉 눈 흘겨 이부자리 밖으로 톡 튕겨 빠져나가며 “아침밥 지어야지” 그 한 마디가 남긴 작은 공간의 갑작스런 썰렁함이지만 가진 것 많지 않은 꽃자리 좁은 남편에겐 가슴 그득 큰 행복이다 별 볼일 없는 쥐꼬리 월급쟁이 하릴없는 소시민 지아비를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는 지지리 공부 못하고 얼굴까지 못생긴 아들놈이지만 어깨가 부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고 곧 늙어 힘 빠질 우리 아부지 제일 좋아하는 술 안 받아주는 놈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하겠다는 딸년은 가슴 속에 넣고 다니는 또 다른 큰 행복이다 잘사는 놈이 10박 며칠 유럽여행 가자 해도 내 꼬락서닐 알아야지 ..

2022.12.18

무직無職의 세월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무직無職의 세월 - 그 해 겨울 참 추웠다 눈 뜨고 일어나는 아침이 시렸다 갈 곳 없는 가장은 모든 게 비굴해졌다 양치질조차도 힘이 없으니 입안 거품에 신이 없고 세수소리 조차도 물방울이 잠잠하다 86년 그 해 겨울 바람이 몹시 불던 날 구겨진 자존심에 포장마차 소주가 다섯 병째 위장에 채워졌다 이상하리만큼 술은 더 이상 취하지 않았다 새로운 기운이 허허롭게 내 허파를 간지럼 태울 때 비로소 찡그린 얼굴에 알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어둑어둑 하늘은 그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뭉게뭉게 구름을 품고 있었고 숨어있는 달 모양으로 움츠러든 내 목은 스승인양 그 구름을 따르고 있었다 스무 해도 더 지난 이 겨울은 한 병의 소주에도 취하고 떠있는 구름에도 관심이 없다 잊혀..

2022.12.12

별걸 다 가지고!

별걸 다 가지고! ㅡ 꼰대들이 제법 모이는 종로5가 육회집에서 꼰대들의 소망인 '長壽' 막걸리를 마시면서 아들네 집과 단절하고 산다는 H형의 씁쓸한 얘기를 들었다 아들 집도 내가 사 주고 손자 둘 키우는 지금까지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며 살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만정이 떨어졌다 가뭄에 콩 나듯이 손자 핑계로 가 본 아들네 현관 입구부터 거실 벽에 이르기까지 온통 가족 사진들이 촘촘히 걸렸는데 눈 씻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제 부모 사진은 단 한장이 없더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서너 달을 아들네와 무심히 지냈다 아내가 며느리에게 아부지 섭섭함을 토로하자 아들에게 직방 들어갔다 기껏 아들놈 한다는 말이 아부지는 참 별걸 다 가지고! 듣고 있는 꼰대2의 막걸리 맛도 소태다

2022.12.07

도정(陶情)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도정(陶情) - “잘 지내시지?” 보고파 목소리라도 들으려 통화하고 싶지만 사는 게 번거로운 세상 행여 그리움도 사치라 할까 어찌 내 심사心事 같겠는가 넌지시 카톡으로 “?” 보냈더니 두 장의 풍경 사진과 세 장의 인물 사진에 각각의 사연을 꼼꼼히 보태 구구절절 보내온 회신 '당신도 내가 보고팠구나!' 울컥 고마운 마음으로 또 보고 또 읽다가 마치 마주 보고 있는 듯 새록새록 솟는 정을 빚었다 * 陶情: 陶情且小詩 - 정을 빚어 다시금 시를 짓는다 남극관(1689-1714)의 시 雜題 중

2022.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