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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그림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움직이는 그림 ㅡ 가뭇없던 그 그림이 다시 나타난 건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노랑, 파랑, 딱 집어 정확히 말하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면 더 당황스러워져서 표현하기 어려운 색깔 푸른빛에 잿빛 섞인 바탕이라고나 할까 색 바랜 똥색 테두리의 액자를 뉘어 놓고 쌓인 먼지를 입으로 풀풀 불어 내고는 외눈 박힌 도깨비 손에 든 빗자루로 탁탁 털어냈다 대청마루 섬돌, 마당 한 귀퉁이에 절구통이 놓여있다 녹색 페인트 듬성듬성 벗겨진 대문에 붙어있는 담장 쇠창살을 타고 긴 얼굴을 가장 슬프게 한 삐쩍 마른 수세미 하나가 손대면 바스락 부서질 것 같은 잎사귀 몇 장에 얽히어 걸려있다 전봇대 거미줄 같이 엉킨 전깃줄에서 용케 뻗어 나온 한 ..

2021.07.29

말씀

☆ 제주 성산 '이생진시비공원'에서 ☆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말씀 ㅡ 제 스승 이생진 시인 말씀입니다 늙지 마 자네가 안 늙어야 나도 안 늙어 아흔을 바라보는 스승께서 어찌 만물의 쇠함을 모르실까만 늙어가는 제자가 안쓰러우셨나 봅니다 카톡으로 이리 당부하시니 스킨도 로션도 듬북듬북 바르고 머릿기름도 부지런히 발라야겠습니다 * 이생진(1929~ ): 올 아흔 셋의 시인께서는 폭염을 피해 오늘도 새벽에 걷고 해 넘어 걷고 10000보를 더 걸으셨다.

2021.07.27

시를 쓴다는 건

수에 모(薛墨, 1966~) 내몽골 출신 화가, 몽고의 역사와 대지를 배경으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린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의 초상화 같다는 평가. 시를 쓴다는 건 ㅡ 그저 또래보다 조금 일찍 철이 드는 일입니다 가령 콧대 높은 명예란 놈이나 화려한 공명이란 놈에게는 가식 없이 쓰는 내 시 몇 줄이 솔직히 더 낫지 않은가 배에 힘주며 자위하고 화가 펄펄 끓다가도 인고의 시 한 줄로 성질 다독여 묵언으로 부처가 된다거나 일상의 대화에서 타인은 못 알아들을 뒷말을 태연자약 생략하고는 싱긋이 홀로 만족하기 다반사!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꽃 떨굼에 눈물 나고 비 오심에 가슴 떨리고 색 바랜 낙엽 더미에서 지난 청춘을 뒤져 찾습니다 타인의 슬픔에 쉽게 따라 울지만 거만스런 돈이란 놈에게는 음메 기죽어! 슬쩍 ..

2021.07.25

옛날 옛적 여의도에서 엎드려뻗쳐!

「옛날 옛적 여의도에서 엎드려뻗쳐!」 때는 수양버들이 강가에 늘어졌던 1960대 초 지금의 노량진 수산시장 자리 장택상 별장과 여의도 비행장 사이에는 샛강이 흘렀지 그 샛강에 땡볕 내리쬐는 날에는 어린 초등학생들도 군데군데 마른 땅 찾아 요리조리 발목이 물에 살짝 빠지면서 건너 다닐 정도였지 국영이 유신이하고 또 누구였던가 이름이 가물가물한 애들 너댓이 지금의 63빌딩 근처 땅콩 서리를 위해 샛강을 건넜지 근데 말이야...땅콩밭에 가기도 전에 경비 서던 공군 헌병에게 발각됐어, 지루하던 차에 장난감들이 스스로 찾아왔으니 얼마나 즐거웠겠어 일단 우리는 그의 명령에 따라 엎드려뻗쳤지 그리고는 주소와 부모님 뭐 하시나로 호구 조사를 당했지만 실제 핵심은 어느 녀석이 예쁜 누나가 있느냐였어 순진한 국영이와 유신..

2021.07.07

좀 배우슈!

좀 배우슈! ㅡ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버스ㆍ지하철 타는 뚜벅이 삶인 내가 이즘 버스 기사님들께 듣는 인사다 종일 그 많은 승객들께 일일이 쉽지 않은 일이다 젊은 기사님들이 싹싹하고 이리 인사를 잘 한다 마을버스 0XX번 머리 하얀 기사 양반! 거 주행 중 통화 좀 하지 마슈! 노인들 느린 승차 시 짜증 좀 내지 마슈! 당신도 머지 않아 밤이유! 인사하는 것도 좀 배우슈!

2021.07.05

DW

사진: 박산 Factoty Suevey Meeting 1997 「 DW 」 못다 한 사랑 얘기만 애달픈 건 아니다 성공해 보지 못한 장사꾼에게는 망한 백제 의자왕의 혼이 아직도 백마강 떠돌 듯 사라진 기업들의 이름 역시 한스럽다 서재 보조 TV를 바꾸었는데 상표가 「DW」다 무언가 했더니「대우」다 아 그렇구나! 상사원 출신들의 우상이었던 '김우중의 대우' 흔적 1999년 대우그룹이 패망할 때 바르샤바 출장 시 폴란드 대우자동차의 앞날이 걱정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근심 어린 얼굴로 묻는 말 What do you think about Daewoo Motors? 심지어는 택시 운전사까지…‥따우! 그랬던 그「대우」가 쥔장은 이승을 떠났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아직 몇 개 기업 이름으로 남아있다 삼천궁녀 대신 그 막..

2021.07.01

부속품 UP6070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황금알 2020 68쪽》 「부속품 UP6070」 원래 난 빽빽한 회로기판에 꼭 끼어 있었다 호흡조차 공동 규칙이었던 이 배치를 벗어난다는 건 죽음, 바로 그것이었지만 어느 날 나만 쏙 뽑혀 버려졌다 불에 태워지려는 순간 천운이 내게 내렸다 재활용이란 한물간 유행가로 태그 위의 넘버링은 'UP6070' 가까스로 이어진 전설 같은 생명이었지만 죽을 듯한 외로움이 준 조급함으로 다시 끼어들 회로기판이 절실했다 얼마의 기다림이었을까 녹슬어 부서진 부속품 하나가 바람에 날려 사라진 빈자리가 났다 있는 힘 다해 냉큼 끼어들고 보니 상하좌우가 삐뚤빼뚤 헐렁하다 나도 여기서 녹슬고 부서지는 중이다 통증을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외롭고 그리움에 떨어야 하는 그 지독한 몸부림의 아픔보다는..

2021.06.24

밤꽃

시집 《'노량진 극장' 72쪽 (우리글, 2008)》 「밤꽃」 유월六月 산 밤나무 숲길 짝을 찾지 못한 전라도 총각 수천 명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각각 뽑아낼 길 없는 가득 찬 정액을 일 년에 딱 한 번 인근 산 숲에 쏟아 부어 밤꽃이 되었다 유월 산 숲 밤꽃 길은 서른 젊은 부부에게는 문 걸어 잠군 달콤한 침실이다 마흔 먹은 립스틱 짙게 바른 여인에겐 깨고 싶지 않은 꿈이다 쉰 살 사내는 이유 없이 아랫도리 힘만 들어갔다 예순 아주머닌 콧속에 밤꽃 가득 부어 눈을 감았다 일흔 잡수신 영감님은 공연히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여든 드신 할머닌 이게 무신 냄새더라 연신 고갤 흔들었다

2021.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