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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품 UP6070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황금알 2020 68쪽》 「부속품 UP6070」 원래 난 빽빽한 회로기판에 꼭 끼어 있었다 호흡조차 공동 규칙이었던 이 배치를 벗어난다는 건 죽음, 바로 그것이었지만 어느 날 나만 쏙 뽑혀 버려졌다 불에 태워지려는 순간 천운이 내게 내렸다 재활용이란 한물간 유행가로 태그 위의 넘버링은 'UP6070' 가까스로 이어진 전설 같은 생명이었지만 죽을 듯한 외로움이 준 조급함으로 다시 끼어들 회로기판이 절실했다 얼마의 기다림이었을까 녹슬어 부서진 부속품 하나가 바람에 날려 사라진 빈자리가 났다 있는 힘 다해 냉큼 끼어들고 보니 상하좌우가 삐뚤빼뚤 헐렁하다 나도 여기서 녹슬고 부서지는 중이다 통증을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외롭고 그리움에 떨어야 하는 그 지독한 몸부림의 아픔보다는..

2021.06.24

밤꽃

시집 《'노량진 극장' 72쪽 (우리글, 2008)》 「밤꽃」 유월六月 산 밤나무 숲길 짝을 찾지 못한 전라도 총각 수천 명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각각 뽑아낼 길 없는 가득 찬 정액을 일 년에 딱 한 번 인근 산 숲에 쏟아 부어 밤꽃이 되었다 유월 산 숲 밤꽃 길은 서른 젊은 부부에게는 문 걸어 잠군 달콤한 침실이다 마흔 먹은 립스틱 짙게 바른 여인에겐 깨고 싶지 않은 꿈이다 쉰 살 사내는 이유 없이 아랫도리 힘만 들어갔다 예순 아주머닌 콧속에 밤꽃 가득 부어 눈을 감았다 일흔 잡수신 영감님은 공연히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여든 드신 할머닌 이게 무신 냄새더라 연신 고갤 흔들었다

2021.06.21

상생

「상생」 두 발로 걷는 사람이 우주의 시간을 한 발로 걷어찼다 땅 딛고 선 남은 한 발이 머뭇거리다가 생각을 불러왔다 생각이 부풀기 시작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불뚝불뚝 크고 작고 혼을 부르는 샤먼의 북소리로 다시 모아진 두 발이 전에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엎어졌던 시간이 가만가만 다가와 두 발을 감쌌다 뿌리가 있다 무형의 잔뿌리가 얼키설키 뭉쳐 있다 각각의 생각으로 꿈틀대며 뭐라 말하는 불로도 결코 태워지지 않는 것들이 미워해야 했던 건 언제나 공평했던 시간이 아니라 순간순간 성급했던 발길질이었다 아니라 해도 그건 오만이었다 두 발을 주무르고 있는 중이다

2021.06.14

대접

「대접」 실제로 평생 살아오길 세일즈맨 을(乙)의 인생이라 대접받는 일보다는 대접하는 일에 훨씬 익숙합니다 치열한 밥벌이 일손에서 저만치 한편으로 떨어져 잡문이나 긁적이며 굳이 詩라 우기는 지금의 삶일지라도 어디 가면 해 오던 그대로 대접을 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두 해째 접어든 갑갑한 코로나로 인한 부재의 그리움 때문인지 3류 시인에게도 '보고 싶다' 문자로 다가오는 샤이 독자들이 있습니다 얼떨결에 밥 한 끼 대접받고 소문난 막걸리꾼이니 종3 골목에서 매운 주꾸미볶음을 안주로 마셨고 빵 커피 쿠폰을 톡으로 받았습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건 아니다 싶어 어디서건 내가 먼저 계산해야지 하는 생각이 앞서 목동 한정식집 넷이 모인 자리 슬며시 일어나 카운터로 가는데 쉰다섯 먹은 A 여인이 눈을 흘기며 다..

2021.06.10

박산 갈증

「박산 갈증」 예순 넘어 살아보니 고진감래를 신봉하여 이만큼 목숨 유지하고 사는 것도 감사한 일임을 절실히 깨닫고는 한숨도 성냄도 어딘가로 숨어버려 점점 道士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사랑한다 보고싶다 그립다 이런 간절했던 언어들이 시나브로 이성의 경계를 허문 지 오랩니다 오랜만에 만난 석순이와 숲속 식당에서 먹고 호수 카페에서 마시며 서너 시간 넘게 이 얘기 저 얘기 사는 얘기 하다가 헤어져 오는 도중 귀가 톡으로 ㅡ '박산 갈증' 덜어 오늘 정말 좋았다 ㅡ 사실은 그 갈증 내가 더 했었는데.... 박산 갈증! 가슴 쨍 울리는 이런 표현 나이 듦에는 모두 시인이 된다는데 사랑하는 나의 벗 석순이 역시 詩를 품고 사는 듯합니다 땡큐 윤 박사!

2021.06.07

이발소 小景

「이발소 小景」 그저 두어 번 이발로 안면 있는 한 쉰 됐을 이발소 아주머니가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이지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웃음으로 ㅡ어서 오세요, 선생님! 어째 안 오시나 했어요? ㅡ나를, 요? 왜요? ㅡ멋지시잖아요! ㅡ.... (순간 당황해서 뭐라 해야 할지, 옆 다른 손님 눈치도 보이고) ㅡ코로나 때문에 머리가 많이 기셨지요? 다른 손님들도 자주 못 오세요 ㅡ근데 선생님 혹시 글 쓰는 일 하세요? ㅡ...(잠시,,,날 아나? 하고 망설이다가)...아니요 글은 무신요, 근데 왜요? ㅡ뵐 때마다 제가 시골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시인이셨던 국어선생님 꼭 닮으셨어요 ㅡ허허! 짝사랑을 닮았다니 이거 내가 영광입니다 좋아하는 친구와 쌈밥 점심에 낮술로 막걸리 마시고는 긴 머리카락이나 자를까 왔는데 젊은 아주머..

2021.05.31

Horror Life

「Horror Life」 딸랑거리는 동전 한 무더기가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지폐 한 장이 배꼽을 간질이는 낌새를 느껴 직감적으로 배에 힘을 주어 구겨 넣고 불리기 시작했다 두 장이 되고 세 장이 되고 제법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배보다 훨씬 더 큰 배들이 첨단의 Medical IT Tool로 배꼽에 구멍을 뚫는 것도 모자라 가슴으로 옆구리로 벤틀리 롤스로이스 마흐바흐 몇 대를 집어넣고는 Stock을 탱탱 불려 꺼억꺼억 되새김질로 소화를 시키더니 빌딩 몇 채 넣어 다시 배를 채웠다 이걸 옆에서 지켜보며 너무 부러워 죽게 생긴 내 손가락과 배꼽은 동전과 지폐를 모두 꺼내 구글에 아부하여 겨우 ‘마윈’ 표 가슴 절개 AI를 구해 많이도 말고 빌딩 딱 한 채만 집어넣으려 용을 쓰는데 삑..

2021.05.17

가고 싶은 나라

「가고 싶은 나라」 5년 만에 47년생 P 형을 만났습니다. 유럽 미주 한국 등에서 일본 종합상사 플랜트 담당으로 일했고 90년대 나와는 업무적으로 만난 사이였지만 세월의 명령으로 이제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입니다. 몇 년 전 큰 수술 후유증 탓인지 부쩍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서울 사람 상사원 출신답게 여전히 깔끔한 입성에 부드러운 대화로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재주는 여전했습니다. 위스키 소주 사케 맥주 종류 불문하고 말술을 마다하지 않았던 P 형의 지금은 그저 따라 놓은 술잔에 겨우 입술을 적시는 정도라 내심 같은 술꾼이었던 동지애가 솟구쳐 아쉽고 짠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툭 던지듯 내게 이리 묻습니다. "이 갑갑한 팬데믹이 사라지면 어디 가고 싶어요?" 순간 이태리 아말피 해변, ..

2021.05.10

사업가의 길

「사업가의 길」 기계 돌아가듯 딱딱한 업무적 만남이었지만 한 해 두 해 세 해 보낸 세월로 그의 사업 내력은 물론 가족 내력까지 하나둘 알게 됩니다 차돌 같이 작고 단단한 체구의 62년생 공장 운영하는 K 사장은 삶에 어느 누구보다 열심이고 여느 장사꾼의 한 자락 까는 얕은 술수 없는 순수한 그의 대화체는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내게도 하는 말 그대로 들립니다 삼겹살집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흔들지 않은 막걸리 병 위쪽의 맑은술만 홀짝홀짝 몇 잔 따라 마셨음에도 오늘따라 취기가 빨리 왔는지 사연 있는 아들 얘기 아내 얘기를 반복하며 전에 없이 눈이 붉게 풀어집니다 술자리 파해 헤어지는데 어려운 막내동생 두고 헤어지는 듯 알싸한 마음이 가득 들어 살며시 어깨를 안으며 어여 들어가 쉬시게나! ..

2021.05.06

휘뚜루마뚜루」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2011 우리글≫ 「휘뚜루마뚜루」 신 게 질색인 홀아비는 배만 먹었고 단 걸 싫어하는 독신녀는 사과만 먹었다 홀아비는 항상 여자가 고팠다 독신녀는 남자가 필요했다 어쩌다 둘이 눈이 맞았다 혀도 맞았다 신 게 별 것이 아니었고 단 거 또한 별 게 아니었다 사과 맛들인 홀아비와 배 맛들인 독신녀는 휘뚜루마뚜루 걸신들렸다 맵고 쓰지 않는 한 둘은 지금 행복하다 ※ 휘뚜루마뚜루 :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 치우는 모양

202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