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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잘 입는 사람이 좋다

「옷 잘 입는 사람이 좋다」 1960년대 태극기 성조기가 그려진 원조 밀가루 포대 배급 받아 너나 할 것 없이 겨우 입에 풀칠하던 어린 시절 고물상 집 영수 형이 폼나는 로마이 구제품 쎄비로를 쪽 빼입고 동네 휘젓고 다니면 혀를 끌끌 차며 어른들 하시는 말씀이 저눔은 부모 등골 빼먹는 놈이야 저리 뽀다구나 잡고 다니면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형 참 멋쟁이였는데 2021년 법적 노인임에도 벗 청노 정주 자산은 쪽 곧은 몸매에 철철이 붉고 노랗고 파란 옷들을 패셔니스트 스타 저리 가라 잘 챙겨 입고 페드로나 헌팅캡을 즐겨 쓰고는 고품격 화려한 신발로 품위를 더하니 영화배우가 따로 없다 다행스럽게도 가난이 추억이 된 나라에서 입에 풀칠 걱정 없이 그럭저럭 장년을 살고 있어 감사하다 단지..

2021.04.26

거문도에서 날아온 시

박산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2015 황금알》 「거문도에서 날아온 시」 '등대의 말은 시다' - 이생진 오른쪽엔 하얀 등대 왼쪽엔 빨간 등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멀쩡한 날 하루 종일 마주 서서 말없이 지내기란 답답하겠다 오른쪽엔 하얀 등대 왼쪽엔 빨간 등대 흰 등대에선 흰 손수건이 나오고 빨간 등대에선 빨간 손수건이 나올 것 같다 오늘은 그들 대신에 내가 서 있고 싶다 여의도 어느 빌딩 속에 시가 날아들었다 D증권 초보 애널리스트 스물여덟 먹은 김수영 양은 한강 공원이 내려 보이는 19층 화장실에 앉아 이생진의 시집 ‘거문도’를 읽다가 물 내리는 소리가 파도 인양 하였다 여의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속의 거문도다 63빌딩 앞 흰 등대에선 흰 휴지가 나오고 밤섬..

2021.04.19

햇살 한 줌

햇살 한 줌 소같이 우직한 일꾼 우리 회사 尹 사장이 내년 함께 회갑 맞을 죽마고우들과 유럽 여행을 하려는데 인원은 몇 명이고 모아놓은 예산은 얼마고 하며 동구권이 좋을까요 서구권이 좋을까요 물어 다수가 유럽이 초행이라니 프랑스 이태리가 좋겠다 했는데,,,. 팬데믹의 이 엄중한 시국에 엄두도 못 내는 단체 유럽 여행 얘기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동시에 그렇지 내년에야 이 지독한 바이러스란 놈이 물러가겠지 생각하니 폭우 그친 하늘 저만치 보이는 햇살 같은 한 줌 희망이 보였다

2021.04.12

괴테 형님!

독일의 화가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1751-1828)이 그린 이탈리아 여행 중의 괴테 초상화(1787년 작).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중에 티슈바인을 만나 함께 나폴리에 다녀오기도 했다. 괴테 형님! ㅡ 2500년 전 철학자를 불러내어 형! 이라 불렀던 나훈아 흉내내 봅니다 겨우(?) 200여 년 앞선 형님! 괴테 형님! 어마무시하게 칭송되는 존경스런 문학적 업적도 그러하지만 이 미물이 정작 부러운 건 괴테 형님께서 그리 좋아하시는 그 많은 여성들을 만날 때 마다 작품에 깊은 감성으로 인간이 지니는 본성의 자유를 투영했다는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이 “당신이야말로 인간이다”했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 아닌가 슬쩍 부아가 나기도 해서, 아마도 번역자의 오류다 억지 꾸겨 넣기로 자위했습니다 그래도 혹자가..

2021.04.08

화엄사 4월, 새벽 이야기

박산 시집 『노량진 극장』 31쪽 「화엄사 4월, 새벽 이야기」 - 화엄사 기상 호텔방 옆에서 잔 벗은 부처를 만나러 새벽 4시 방문 열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나갔다 이불 속 눈만 감고 있는 나는 시詩를 만나려고 여명黎明을 기다렸다 부처를 만나는 시간이나 시를 만나는 시간이나 다 새벽이고 아침이다 나도 어서 일어나야지 - 새벽 새 소리 새벽어둠 발자국 죽여 조용히 지나는 내 소리가 시끄러운가 반기는 소리가 아니지 저 소리는 숲의 적막을 깨는 내가 미워 그럴 거야 시커먼 내 그림자도 무서워 그럴 거야 그렇다 한들 그리 시끄럽게 울지 마라 알고 보면 난 예순 넘은 너그러운 아저씨란다 - 화엄사 입구 개울가 붉은 벚꽃 붉은 늦벚꽃 몇 잎이 새벽 개울 흐르는 소리에 슬피 떨어진다 개울 깊은 탓에 남보다 며칠..

2021.04.01

뻔뻔한 계좌번호

「 뻔뻔한 계좌번호 」 한 다리 건너 소개로 보냈던 원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편집자와 전화 대화 중에 "계좌번호 문자로 주세요!" "내 전화번호와 같고 IBK입니다" 문자도 필요 없이 금융 소통도 이리 편리한 세상이다 친구 딸 결혼식 양가 제한된 하객으로 예식장 가까이 사는 부자 벗 J가 대표로 참석하겠다 해서 송금하여 내 축의금 봉투를 부탁했었는데 J 역시 불참하게 되어 송금 돌려 주겠다 계좌번호 묻는 중에 " J야! 달랑 내가 보냈던 돈만 넣지말고 이왕이면 가난한 이 벗을 구휼하사 구제 금융 좀 보태서 넉넉히 넣어라 부자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계좌번호가 내 전화번호야 평생 잊을 일 없지?" 사진: 인천 신포동

2021.03.28

자기 기준!

'제주 유채꽃' 사진작가: 한성 「자기 기준! 」 80평 아파트가 새가슴 내 기준으로는 운동장이다 말했지만 어떤 이 기준으로는 좁아 갑갑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선술집 시뻘겋게 구운 돼지갈비에 막걸리 한 사발이 일과인 내게 빈말이라도 세상 팔자 늘어지게 사는 양반일쎄 은근쩍 추임새로 장단 맞춰주는 위인이 있음에도 또 어떤 이가 건네는 말은 옛날에 그래도 호텔 드나들던 놈이 왜 그리 주접을 떨며 사느냐고 우스개 시비 거는 인간 하나 있긴 합니다 소싯적 아버지 말씀대로 다 형편대로 사는 거다 자기 기준! 내 꼬라지가 지금은 막걸리다 자위합니다 하긴 고층 오피스텔 지은 J 형은 상류층 제 형편을 깔고 앉아서는 평생을 움켜쥐고 사는 습성만 남아 오피스텔 관리실에서 혼자 라면 끓여 먹다 죽어 똥도 못된 것도 모자라 ..

2021.03.25

개나리꽃 한 줌

≪시집 노량진 극장≫ 2008 29쪽 「개나리꽃 한 줌」 운동 삼아 걸어 출근하는 날 아파트 뒷길 언덕배기 초등학교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봄이 되어 앉아있다 봄날 소인국에 봄 같은 아이들이 꿈틀댄다 짧은 다리에 끌고 메는 가방이 앙증맞다 웃고 재잘거리는 하얗고 뽀얀 얼굴이 봄빛이다 교문에 서서 인사 나누는 어린 여선생도 봄꽃이다 학교까지 따라 온 젊은 엄마도 봄나물이다 문득 나도 봄풀인가 하다 그 뻔뻔함에 멋 적어 씩 웃어본다 한 꼬마 봄이 병아리 같은 걸음으로 날 앞질러 쫑쫑 간다 가늘고 여린 예쁘고 귀여운 개나리꽃 한 줌 같다 그러다 문득 ‘네가 내 나이면 나는 없겠지’ 하니 봄이 사라졌다

2021.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