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그림

박산 2021. 7. 29. 15:39

< '無題' 이광무 화백 >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움직이는 그림 ㅡ


가뭇없던 그 그림이
다시 나타난 건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노랑, 파랑, 딱 집어 정확히 말하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면
더 당황스러워져서 표현하기 어려운 색깔
푸른빛에 잿빛 섞인 바탕이라고나 할까
색 바랜 똥색 테두리의 액자를 뉘어 놓고
쌓인 먼지를 입으로 풀풀 불어 내고는
외눈 박힌 도깨비 손에 든 빗자루로 탁탁 털어냈다

대청마루 섬돌, 마당 한 귀퉁이에 절구통이 놓여있다
녹색 페인트 듬성듬성 벗겨진 대문에 붙어있는 담장 쇠창살을 타고
긴 얼굴을 가장 슬프게 한 삐쩍 마른 수세미 하나가
손대면 바스락 부서질 것 같은 잎사귀 몇 장에 얽히어 걸려있다
전봇대 거미줄 같이 엉킨 전깃줄에서 용케 뻗어 나온 한 줄에
흰 배를 드러낸 제비 한 마리가 앉아있다
아버지 같은 누군가가 보일 것 같은데 아무도 없다

그림 속 움직임이 포착됐다
우선 바람이 추녀 위로 불었다
툭 불거져 나온 사랑방 문풍지가 살짝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 위쪽에 보이던 뭉게뭉게 구름 몇 점이 은은히 사라지더니
고흐같이 생긴 귀에 붕대를 한 화가가 그림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붓도 쥐지 않고 노란 물감을 화난 듯 뿌리고 갔다
순간 그림이 망쳐질까 걱정이 되었지만

제멋대로 퍼지고 색을 달리하더니
한참을 저녁 붉은 노을이었다가
깜깜 어둠을 몰고 와서는
노랗고 둥근 별 점을 무수히 찍어 놓았다
반짝이는 것들이 처음 보는 듯 마냥 신기했다
기억은 불분명했지만 그동안 해 온 습관 같은 기다림으로
샛별로 다가오는 푸른 새벽을 당연히 기대하며 스르르 잠을 청하려는데
익숙한 얼굴의 노시인 한 분이 그림자를 데리고 마당을 쓸고 갔다
다 쓸어내지 못한 짠하고 슬픈 시 같은 단어 여남은 개가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흩날리더니
제각각 구석을 찾아 촘촘히 박히는 순간
그림의 모든 움직임도 멈추었다

움직였던 그림을 굳이 기다리지 않을 작정이다
오랜 세월 벼르고 별러서 찾아온 그림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그림은 그림자를 그리는 순간 움직이게 되어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아도 과거는 기다리는 게 아니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음光陰  (0) 2021.08.11
웃다  (0) 2021.08.05
말씀  (0) 2021.07.27
시를 쓴다는 건  (0) 2021.07.25
그냥  (0) 2021.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