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야의 푸른 샛별 30

인디밴드Indie band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인디밴드Indie band - 얼핏 보면 밝은 것 같지만 온통 검붉은 풍선들이 천장 여기저기에 걸려 喜·怒·哀·樂 어느 것도 아니게 그냥 헤죽거리고 있는 집에 잔뜩 낀 허영 실현해 볼까 그냥저냥 봐줄 만한 몸뚱어리에 웃음을 미끼로 들어갔습니다 귀청 찢을 듯 강한 전자음악 애초 노래 재능 없는 쉰 목소리들 반복되고 강제된 로봇 춤들 밤낮 구분 사라진 곳에 내내 뜨지 않는 별만 바라보는 일 아무리 마셔도 갈증에 타들어 가는 혀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이런 것들에 으스스 진저리치다가 머릿속 거품 일순간 쑥 빠져나간 느낌 앞뒤 볼 것 없이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변하는 게 싫은 좁은 골목 통치마가 푸근한 시장 아주머니 짐 자전거, 택배 오토바이의 움..

2022.05.25

난 머슴이로소이다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난 머슴이로소이다 - 에헴, 게 아무도 없느냐! 소리 지를 일도 없고 그저 세파에 아부나 할 양으로 중얼중얼 나 죽었오 나 죽었오 쥐 죽은 듯이 골목이나 기웃거리다 막걸리 한 사발에 고기 한 점 씹어 쪼꼼 커진 간덩이로 내뱉는 분노 에이 엿 같은 세상! 쌍시옷 섞었다가 누구 듣는 이도 없는데 움츠려 휘휘 사방을 둘러본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이리 오너라 아침 늦잠은 상전들의 특권 깨우는 이 없어도 깜깜 새벽 발딱발딱 일어나 개꿈 해몽에 들이대는 어설픈 주역 64괘 새벽을 서성이는 난 머슴이로소이다

2022.03.23

광음光陰

게리 번트(Gary Bunt, 1957~) 영국 켄트주 출신 화가, 시인. 음악 밴드 기타리스트, 건설현장 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 전전. 마약과 알코올 중독 등을 겪었다. 자기치료와 성찰의 ‘사색적 여정’을 그림으로 그린다. 시집《무야의 푸른 샛별, 2015 황금알》 광음光陰 ㅡ 습濕한 은둔 속 꿈틀대던 작은 벌레 한 마리 용케도 새의 먹이가 되지 않고 몸통에 날개를 달았다 숲을 떠났다 아집我執에 취해 만든 목표 허공에서 높이 날 생각만 했다 억지웃음에 호들갑을 떨었고 내가 벌레였음을 잊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날개 힘 빠지던 무렵 잦은 눈물을 흘릴 그때다 회한悔恨 따위의 자학의 습관들 날갯짓이 슬프다 가만가만 다시 기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백랍의 날개보다는 퇴화退化가 더 좋다 난 이카로스가 아니다..

2021.08.11

거문도에서 날아온 시

박산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2015 황금알》 「거문도에서 날아온 시」 '등대의 말은 시다' - 이생진 오른쪽엔 하얀 등대 왼쪽엔 빨간 등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멀쩡한 날 하루 종일 마주 서서 말없이 지내기란 답답하겠다 오른쪽엔 하얀 등대 왼쪽엔 빨간 등대 흰 등대에선 흰 손수건이 나오고 빨간 등대에선 빨간 손수건이 나올 것 같다 오늘은 그들 대신에 내가 서 있고 싶다 여의도 어느 빌딩 속에 시가 날아들었다 D증권 초보 애널리스트 스물여덟 먹은 김수영 양은 한강 공원이 내려 보이는 19층 화장실에 앉아 이생진의 시집 ‘거문도’를 읽다가 물 내리는 소리가 파도 인양 하였다 여의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속의 거문도다 63빌딩 앞 흰 등대에선 흰 휴지가 나오고 밤섬..

2021.04.19

그가 전화 했다

◀무야의 푸른 샛별, 60쪽 ▶ 「그가 전화 했다」 함박눈 내리는 날 그가 전화 했다 약간은 탁하지만 익숙한 음성으로 여기 오대산이야 쪽 뻗은 느릅나무 숲 툭툭 몇 뭉치 눈이 떨어졌다 작은 움직거림 새들 은은한 동종 소리 시린 귀를 덮는 순간 그의 말이 다시 들렸다 온 지 좀 됐는데 종로 뒷골목 술집이 그립다 여기서 살까 왔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그리고 말이야 저번에 갔던 그 집 매운탕… 눈보라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바지춤 내려 흔들어 포물선 그어 시원하게 오줌 줄기 뿌리고는 통쾌한 기분으로 풀썩 큰 대자로 누웠다 쉼 없이 쏟아 뿌려대는 하늘이 위대했다 흰 숲에서 들리는 꼼지락거리는 소리 눈동자 맑고 검은 고라니 한 마리 뒤뚱거리며 지나갔다 그의 말이 다시 들렸다 밤이 무서워 아니 싫어 겨울바람..

2021.01.25

도정(陶情)」

「도정(陶情)」 “잘 지내시지?” 보고파 목소리라도 들으려 통화하고 싶지만 사는 게 번거로운 세상 행여 그리움도 사치라 할까 어찌 내 심사 같겠는가 넌지시 카톡으로 “?” 보냈더니 두 장의 풍경 사진과 세 장의 인물 사진에 각각의 사연을 꼼꼼히 보태 구구절절 보내온 회신 '당신도 내가 보고팠구나!' 울컥 고마운 마음으로 또 보고 또 읽다가 마치 마주 보고 있는 듯 새록새록 솟는 정을 빚었다 * 陶情: 도정차소시陶情且小詩 - 정을 빚어 다시금 시를 짓는다 남극관(1689-1714)의 시 잡제雜題 중 *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26쪽

2021.01.18

춤을 추고 싶다

「무야의 푸른 샛별」 106쪽 춤을 추고 싶다 노랗고 붉은 것들이 여명의 태양처럼 춤사위에 뭉게뭉게 묻어나 부드러운 놀림의 어름새로 누군가에겐 베풂으로 누군가에겐 끌림으로 누군가에겐 파트너로 강하지 않아 지치지도 않는 그런 춤을 안단테칸타빌레! 빠른 시간들을 느리게 다독이며 가슴 깊은 상처들 끼리끼리 어우렁더우렁 춤을 추고 싶다 나를 위한 춤을 * 어름새: 구경꾼을 어르는 춤사위

2020.11.02

조 사장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56쪽 *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태풍 부는 날,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나 하면서 냉면 한 그릇으로 점심 약속을 하고 나니, 불현듯 이 시가 생각나 올려 봅니다. ◁ 조 사장 ▷ 불알친구 조 사장 동대문시장 원단 장사 그의 이마 주름만큼 이력 깊지만 “돈 좀 버냐?” 한결같이 “그냥 그렇지 뭐” 만난 지 반세기가 넘도록 약속 시간 단 한 번 어긴 적 없는 신사 내겐 그냥 허투루 해도 되겠건만 톱니가 시겟바늘 돌리듯 정확하다 술 못 마시는 체질 잘 알면서도 내가 따라주는 막걸리를 홀짝홀짝 성의껏 들이키는 배려 작가 Y가 내게 묻기를 맘 편히 함께 여행할 친구 있느냐기에 조 사장, 이 친구 있기에 망설임 없이 있다 했더니 예순 줄 나이, 그런 친구 있다면 행복한 거란다 어제 점심..

2020.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