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옥 화가 27

잊어버렸다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잊어버렸다 - 우연히 본 내 손등 주름이 쪼글쪼글한 게 영락없는 영감님 손이다 봄 타서 그렇지 하고 잊어버렸다 귀밑 흰 머리카락이 왜 이리 꼬불거리고 일어나는지 그러다 말겠지 하고 잊어버렸다 눈가 다크서클이 기분 나쁘게 조금씩 퍼지면서 세력을 확장해도 거울에 뭐가 끼었나 하고 잊어버렸다 운전하다 뒷좌석 물건을 꺼내려 팔을 돌렸는데 삐끗 하더니 고장이 났다 많이 아프지만 그러다 말겠지 하고는 잊어버렸다 길가다 낯이 아주 익은 사람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헤어졌는데 새삼 ‘저 사람 누구지? 누구더라?’ 기억이 없다 내 친구도 그렇다고 걱정 말라니 잊어 버렸다 오줌발 힘없어 숨 몰아 시간 끌다 질질 나오니 짜증난다 집안 형이 그러는데 다 그런 거라기에 잊어버렸다 아파..

2022.08.02

일흔 향해 가는 길목에 -

'mémoire bleue' 김명옥 화가 일흔 향해 가는 길목에 - 월요일 아침 출근을 해 보니, 윤 사장은 포항에 급한 납품 건이 발생해 내려가는 중이라 해서, 홀로 하꼬방 회사 썰렁한 사무실에서 업무 메일을 켜는데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납니다. 편리상 로그인 상태를 유지하다가 아마도 지난주 로그아웃을 했었나 봅니다(사실 이 기억도 없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완벽히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난다는 ‘현실’에 살짝 절망을 합니다. 겨우겨우 알아내 독일 업무 메일 답변 하나를 마쳤는데, 자주 소통하는 벗 J의 ‘시간 되면 전화 요망’ 톡이 뜹니다. J는 작은 우체국을 지하철역 근방에서 늘그막에 운영하는데, 지난주 수하물을 우체국 차에 실으려다 카트에 실린 수하물 한 무더기가 떨어지면서 머리를..

나의 이야기 2021.11.15

주책없이 오지랖만

주책없이 오지랖만 ㅡ 저녁 8시 지하철 내 바로 옆 손을 꼭 잡고 붙어 있는 젊은 남녀 속삭이는 얘기들이 굳이 주워 담으려는 것도 아닌데 귀에 쏙쏙 듭니다 하루를 주어진 운명대로 열심히 살았던 장삼이사들의 그렇고 그런 일상의 회사 얘기부터 점심으로 먹었던 파스타가 정말 맛있었다는 얘기에 이르렀을 즈음 툭 던지듯이 남자가 묻는 말 "그거 말씀 드렸어? " 결혼식 얘기입니다. 갑자기 이들의 대화에서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스쳐도 될 이들과의 인연이 조금 더 길었음인지 내가 내리는 역에 이들도 내리고 자연스레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갑니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 버스정류장이 있는 사거리로 나가는 직전 길목에는 MOTEL 간판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깜빡이는 골목이 나옵니다 손목을 슬며시 잡아끄는 남자에게 "돈 아껴야지 ..

2021.11.01

은사시나무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은사시나무 - 야트막 산길 “어디 가세요!” 잎새 잃은 은사시나무가 외쳐요 쓰윽 쳐다보니 삐쩍 말라 키만 멀거니 큰 벌거벗은 모습 어찌나 추워 보이던지 떼로 모여 사는 녀석이 왜 저리 청승맞게 홀로 떨어져 있는지 “왜! 그건 알아 뭐하게!” 생각 없이 뱉어버린 짧고 퉁명스런 짜증에 나무 꼭대기 몇 장 안 남은 잎사귀들 어쩔 줄 몰라 팔랑거려요 짠한 마음으로 다가가 어루만져 속삭였지요 “사실은…‥ 갈 곳도 없이 그냥 가는 거야” 그제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 나도 그냥 서 있는 거예요 너무 외로워서…‥” 등 뒤로 찬바람이 불어왔지만 이미 깊은 사이가 된 듯 서로의 가슴을 비볐지요

2021.10.14

소풍 끝낸 풍경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소풍 끝낸 풍경」 불알이 어찌 생겼는지조차 잘 아는 친구가 죽어 장례식에 갔어요 죽은 이유는 말 안 할래요 병으로 죽었건 무엇으로 죽었건 소풍 끝낸 건 다 마찬가지니까요 좀 더 같이 놀지 못하고 성질 급해 먼저 간 빙신 같은 놈 말해 더 무엇 하겠어요 그래도 살아생전 오랜 세월 죽여 죽어라 같이 다닌 정리情理가 그게 아니거든요 문상객이 많던 적던 조화가 많던 적던 부조금이 많던 적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같이 놀던 친구들이야 쓴 소주 한 잔에 눈물 고인 짠한 마음으로 ‘잘 가라’ 할 밖에 그런데 말입니다 화장터 불구덩이 방향으로 자리 잡은 방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검은 리본 두른 내 친구 놈 얼굴 사진은 제법 근엄한 척 합니다 진즉에 혼 빠진 관 속 제 육..

2021.08.23

웃다

김명옥 화가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웃다 ㅡ 한강 다리 중간 즈음 노을이 붉게 타는 방향 난간을 잡고 어떤 사내 하나가 큰소리로 웃고 있다 지나가는 차들이 힐금거렸다 택시 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 저런 꼴통 같으니 만만한 게 아래 흐르는 강물이니 제 잘난 맛에 저러지 ” 트럭 탄 프로이드가 말했다 “ 그래 웃어라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면 다리위서 저리 웃겠나 더 크게 웃어라 울지만 말고 ” 버스 탄 칸트가 말했다 “ 뭔가 생각지도 않은 대박이 터졌구만 틀림없어 로또가 터졌어 ” 자가용 탄 베르그송이 말했다 “ 못 볼 걸 봤어 틀림없이 저 친구 빚쟁이가 죽었나? ” 노을이 저물어 가는데도 사내는 계속 웃고 있다 웃다 그리고 웃다 웃다 그리고 ..

2021.08.05

행복한 낙원

「행복한 낙원」 자연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가끔 봅니다. 사연을 들어보면 세상 사는 일에 지쳐 선택한 순수 자연에 의탁해 살아가는 쉽지 않은 그들의 삶의 고뇌가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자연인에게는 老莊의 玄學의 경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단어에 으뜸은 행복하다, 편하다, 자유롭다, 여기가 나만의 낙원이다 라는 자기만족의 말입니다. 일맥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각자가 추구하는 만족의 정도는 다 다르니 말입니다. 주제를 좀 벗어나는 듯한 말입니다만, 아내가 오래전에 실버 잡지사(노인 잡지) 기자 노릇할 때 당시 수도권에 위치한 고급 실버타운을 취재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상시 대기 중이고 삼시 세끼가 훌륭한 자체 식당에서 제공되니 밥해 먹을 일도 없습니다. 여기 입주..

나의 이야기 2021.04.29

한결같은 이가 좋다

'Candle Reading' 김명옥 화가 『인공지능이 지은 시 』 44쪽 「한결같은 이가 좋다」 순간의 흥취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소 가득 머문 얼굴로 다가오더니 차츰차츰 알아갈수록 사귀는 시간 무기 삼아 언제 그랬냐는 듯 매사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책임은 살살 피할 생각만 하고 제 주장만으로 핏대 세우다가 걸핏하면 혼자 삐치고 혼자 토라지고 궁지에 몰리면 어설픈 핑계로 얼버무리는 어제와 오늘이 너무 다른 이 난 오고 감이 한결같은 이가 좋다

2021.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