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옥 화가 26

Identity

시집 『노량진 극장(2008 우리글)』 78쪽 「Identity」 작은 다툼에도 마음이 곯아 명치끝이 아립니다 성질 나빠 그러려니 해도 곰곰 따지고 보니 살아온 인생에 정직하지 못 함이 그새 드러나곤 합니다 누가 좀, 그런 나를 혼 내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각질이 굳어버린 뇌실(腦室)로부터 나온 삶아 뭉그러진 물감자 같은 비굴한 타협은 조건 없는 용서를 계속 합니다 그 용서의 반복은 자비스런 부처님과 자애하신 예수님에게도 따귀 맞을 일입니다 진전이 없는 생활은 권태로움을 더 하고 믿음 없는 자만은 오만을 부르더니 배움이 없는 답보는 결국 위선을 잉태 할 뿐입니다 그 잉태가 만들어내는 다툼은 보기 싫게 찢어지고 빛바랜 붉은 꽃무늬 스커트자락이고 어린 아해 먹다 거리에 떨어뜨린 고추장 묻은 떡볶이 한 조각..

2021.02.08

성세낙사

「무야의 푸른 샛별」 76쪽 성세낙사 하늘 열려 구름 웃고 강은 바다로 유유히 꽃은 시부저기 피었다 지고 새들은 산과 들 자유로 날고 비도 순하게 오시고 눈도 탐스레 나리시니 봄·여름·가을·겨울 모두 사랑이라 사람들은 온통 착한 일만 하니 먹고 입을 게 지천인 세상 여기저기 태평성세 노랫소리로 탄생 알리는 잦은 고고지성 만발한 함박꽃웃음 여기저기 * 盛世樂事: 태평한 세상에 즐거운 일 ** 시부저기: 별로 힘들이지 않고 거의 저절로

2020.11.06

구박받는 삼식이

「구박받는 삼식이」 48쪽 구박받는 삼식이 - 광삼씨는 29년간 꼬박꼬박 출근해 열심히 일했다 그 덕에 새끼들 공부시키고 알뜰살뜰 마나님 모시고 그냥저냥 남들만큼은 살았다 올해로 퇴직 이 년 차 쓰고 남을 정도로 넉넉히 모아 놓은 돈은 없지만 공부 끝낸 아이들 직장 다니니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삼십 년 경력 ‘살림의 제왕’ 마나님께서는 출근 안 하고 집에 있는 서방이 측은했던지 처음 두어 달 정도는 점심밥도 차려 주셨다 퇴직 후, 딱히 정해 놓고 갈 데 없는 광삼씨 아침 운동 뒷산에 올랐다가도 돈도 아낄 겸 꼭 돌아와 집밥을 먹었다 책 보러 도서관에 갔다가도 마나님도 볼 겸 꼭 돌아와 집밥을 먹었다 학교, 동네, 사우나, 다양한 친구 모임 컴퓨터배우기 봉사활동 헬스클럽 등등 잡사雜事에 하루 일정 빡빡한 ..

2020.10.26

내가 낸 길

「인공지능이 지은 시」 52쪽 내가 낸 길 자주 다니는 뒷동산 숲에 사색을 위한 나만의 길을 냈습니다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풀 뽑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지요 하루 두어 시간씩 닷새에 걸쳐 장갑 낀 손노동으로 한 쉰 걸음 정도의 길이 났습니다 호젓하게 들어 있다가 모기에게 수없이 물렸지만 다람쥐도 만나고 새 소리도 듣고요 한 해가 지났습니다 두 해도 지났습니다 백 걸음 정도로 길어졌습니다 혼자 다니는 길이 영원히 혼자일 수는 없겠지만 이백 걸음을 원치는 않습니다 노란 숲에 난 두 갈래 길에서 이 길 저 길 망설였던 시인을 뵌다면 직접 길을 내시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도 나는 숲을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다 나만의 길을 또 낼까

2020.09.28

청춘의 덫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70쪽 청춘의 덫 벌어 먹고사느라 늘 시간에 쫓기는 무모한 청춘을 보냈던 내가 언제부터였던가 쌓이고 쌓인 그 시간이 상으로 내어 준 세월 덕택에 이젠 내가 지배하는 시간에서 꿈에도 그리던 낮술을 마신다 술을 좋아하는 게 무엇보다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역시 시간에서 해방된 유유상종의 몇 안 되는 벗이 있음이다 비틀거릴 정도로 낮술 마시기엔 기력 쇠했음을 잘 아는 처지이고 그리 막갔던 청춘은 없었기에 소풍 떠난 지 오랜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딱 반주 한 잔씩!" 을 버릇처럼 외친다 이제껏 낯설었던 낮 커피를 마신다 국밥에 씹혔던 파 마늘과 막걸리 소주 냄새를 헹군다 엽차 한잔에 레지 눈치받았던 다방보다 ‘셀프’라는 독립성에 몇 갑절 편하게 담소한다 누군가에 보고할 것도 누군가에 굽..

202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