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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컴퓨터다

시집 《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나는 컴퓨터다 - 이끼 낀 내 하드웨어는 매일 먹는 고혈압 약 몇 알에 잠잠하고 수전증 걸린 내 마우스는 알코올 몇 방울에 종종 의존하지만 삐걱거리는 바디 역시 눌러 지압할 스위치만 잔뜩이다 내장된 소프트웨어 몇 개는 헐어 아예 갈아야 하는데 몇 종류의 위장약은 내성(耐性: tolerance)만 더 키우고 삥삥 아프게 소리 나는 건 점점 더하다 사람은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다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모니터는 성기이고 바이러스에 약한 컴퓨터는 비아그라를 찾는다 나는 컴퓨터다 * 진화론의 이론적 구조(이기적 유전자: selfish gene)를 쓴 Richard Dawkins는 “사람은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전파를 위해 만든 생존 기..

2022.02.21

간만 보다 가는 에고이스트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간만 보다 가는 에고이스트 - 너무 잘난 사람들 너무 있는 사람들 시건방지고 혹여 가진 거 빼앗길까 보아 옛 친구는 떨거지라 애써 잊고 이사람 저사람 새로 사귈 생각만 하고 짠가 매운가 신가 쓴가 단가 슬쩍슬쩍 골고루 핥아 보고는 제 간에 안 맞을라치면 언제든지 뱉으려 합니다 미역국에 몇 방울 떨구기만 해도 감칠맛이 입안 가득 사르르 혀를 감는 오래 묵은 간장 맛같이 벗도 그냥 웃어주는 오랜 벗이 좋습니다 큰소리로 호들갑 떠는 이들이야 퍼먹고 노는 술자리에서나 좋지요 소쩍새 소리 저만치 들리는 숲길 홀로 걷다 홀연히 떠오르는 그리운 친구 맛난 음식에 향 깊은 술잔 앞에 두고 간절히 함께 나누고 싶은 친구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중얼거리다 나도 모르게 눈물..

2022.02.18

詩詩한 2월 일기

詩詩한 2월 일기 ㅡ 입춘 지난 날씨 정오에도 영하 4도 아직 목덜미가 차갑다 매운 주꾸미 비빔밥 한 그릇에 나는 동동주 반 방구리를 마셨고 술 한 방울도 안 하는 O형은 왕새우 튀김에 콜라를 마셨다 평소 절대 안 걷는 게 원칙이라는 양반이 웬일로 커피숍 대신 인근 천문대를 오르잔다 코로나 시국에 찻집 가는 일도 마음 불편하던 차에 옳다구나! 야트막 산자락 들어 도란도란 걷다가 한 10분 아니 15분 녹지 않은 눈이 드문드문 쌓인 오르막 계단을 오르는데 스틱까지 거머쥔 거친 숨소리로 하는 말이, ㅡ 남들은 웃겠지만 나는 여길 오르는 일이 히말라야다 푸하하하! 뻥이 세긴 너무 세다! 문 닫힌 천문대 볕 좋은 벤치에 앉아 살아오고 살고 있는 그렇고 그런 얘기 나누다 내려오니 날이 많이 풀렸다 도심 숲속 양봉..

2022.02.11

파이어 족

파이어 족ㅡ 잿빛 과거는 가급적 멀리하는 게 좋다. 나이 듦에 자꾸 들춰내어 회상하는 일들이 그렇다. 카르페 디엠! 둘보다 작은 하나여도 괜찮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종종 가정법 과거완료를 자신에 대입해 보면 가장 아쉬운 건 여의도 비행장 근처 노들나루 동네에서 비행기 이착륙을 보고 자란 때문인지 자유 여행을 향한 갈증이 크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시대적 한계가 있었음을 몸뚱이 하나 비벼 산 세월로 잘 알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지금 존재하는 우리 후손 파이어 족들이 한없이 부러운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부언하면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은 경제적으로 자립해 조기에 직장 은퇴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로, 젊었을 때 ..

나의 이야기 2022.02.09

또, 길을 가렵니다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또, 길을 가렵니다 - 이만하면 다 왔는 줄 알았는데 아직 갈 길이 남았습니다 이런 적이 처음 아닌 게 다행입니다 항시 당황스럽지만 지금 같은 실망에 익숙해져서 한탄 대신 긴 한숨을 내쉽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도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가야겠지요 금싸라기 캐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바보가 아니거든요 배불리 먹길 바라지도 않습니다 돼지가 아니거든요 험하지 않은 길섶에 핀 꽃처럼 어느 누구나 그냥 보아도 편안한 그런 편편한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서 나지막이 부르는 노래가 숨 쉬고 있는 모두를 위한 생명의 노래였으면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곧 보일 거라는 확신으로 또, 길을 가렵니다

2022.02.03

밑천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황금알 2020》 밑천 - 그간 입고 먹고 다닌 세월이 얼마인데 정작 찌울 건 안 찌우고 정말 지닐 건 생각 없이 버리다가 순간의 쾌락에 물든 게으름이 규칙을 까맣게 잊은 채 흐물떡거리는데 땟국에 절어 나달나달 해진 옷자락들이 하잘것없이 식어버린 속내만 긁어댄다 모처럼 큰 호흡 자위 아닌 자위로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짧은 밑천 다 드러났는데도 헛기침에 모른 척 점잔이라도 빼 볼 양으로 에헴! 에헴! 지나가는 강아지가 킥킥 배부른 참새도 조잘조잘

2022.01.27

사유思惟의 끝에는

사유思惟의 끝에는 ㅡ 나뭇잎 떨어지고 단풍 진들 북풍한설 몰아친들 내 알 바 없으니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해 잔뜩 걸린 세파에만 중독되어 세상 탓하며 산 게 바로 어제였는데 흰 수염 검버섯이 안면 주름을 파고드는 오늘 이제서야 내 인생에 핑계 없음으로 풍치전체風馳電掣의 세월을 깨닫고 습관 되어 올려보는 허허로운 하늘에는 콩 볶듯 쫓기던 내 삶의 편린들을 뭉게뭉게 구름으로 꺼내어 아는 척이지만 정작 나는,,,. 짐짓 시치미 뚝 떼는 딴청으로 새순 나고 꽃 필 제 또 몇 번일까 천지조화를 헤아리고 또 헤아리다 결국은 우주의 티끌 됨에 얼굴 붉힌 헛기침으로 오늘은 누굴 만나 막걸리를 마실까 이 생각이 들자 맘이 좀 놓인다

2022.01.23

무위無爲 Ⅰ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황금알) 2015》 무위無爲 Ⅰ 상자 안 등불 하나 켜 놓고 하나둘 셋 주어진 숫자로 하루 세 번 저린 발을 뻗고 딱 세 끼를 챙겨 먹으며 누군가의 이론을 신앙으로 품고 살다 갑자기 찾아온 태풍 같은 무지막지한 그런 것들에 부서진 상자 밖으로 튕겨 나왔다 어둠에 물체들이 손에 잡혔지만 처음엔 온통 두려움뿐이었고 빛을 찾는 이유가 막연했다 굳이 말하자면 무엇엔가의 의존이었다 시간이 물어다 준 여유가 무력한 한숨을 꾸짖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자꾸 움직였고 배가 고플 때마다 먹었다 이전에 경험 못 했던 이를테면 원초적 생명 같은 것들이 심장을 평안케 움직였고 독립된 사고가 상상력을 확대하니 창조 의지가 몰려 왔고 자유와 자율의 사전적 의미의 경계 따위는 무너졌다 이론이다 이념이다..

2022.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