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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슬픔

시집 《'인공지능이 지은 시' 중, 2020 황금알》 도심의 슬픔 - 네모반듯한 아파트 빌딩들 가득하고 살이 집기들조차도 다들 각진 것투성이 무엇보다 직선만이 우선하여 쉬고 숨 쉴 둥근 숲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고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앞만 보고 질주하는 사람들 멀쩡하던 사람이 거리에 쓰러져 신음을 해도 아예 관심이 사라져 간 이기적 공간에서는 그저 죽어 떨어지는 낙엽 같은 하찮은 생명일 뿐 누군가를 가슴 속으로 사랑해야 하는 일조차도 저울로 그 무게를 정확히 재고 그 균형이 딱 맞을 때 그제야 입을 맞추고 계약서상의 의무적인 배를 맞춘다 여유 속 굽어져야 생기는 낭만은 그저 헤프고 천박하다 비난할 뿐 달이 차고 기울어짐과 별을 헤아린 적이 있는지 한낮 구름의 느린 움직임은 얼마나 능청스런 자유인지 깊지 ..

2022.03.26

난 머슴이로소이다

시집 《무야의 푸른 샛별 중, 2015 황금알》 난 머슴이로소이다 - 에헴, 게 아무도 없느냐! 소리 지를 일도 없고 그저 세파에 아부나 할 양으로 중얼중얼 나 죽었오 나 죽었오 쥐 죽은 듯이 골목이나 기웃거리다 막걸리 한 사발에 고기 한 점 씹어 쪼꼼 커진 간덩이로 내뱉는 분노 에이 엿 같은 세상! 쌍시옷 섞었다가 누구 듣는 이도 없는데 움츠려 휘휘 사방을 둘러본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이리 오너라 아침 늦잠은 상전들의 특권 깨우는 이 없어도 깜깜 새벽 발딱발딱 일어나 개꿈 해몽에 들이대는 어설픈 주역 64괘 새벽을 서성이는 난 머슴이로소이다

2022.03.23

마음씨짱

마음씨짱 ㅡ 열 번 가면 열 번 다 환한 얼굴로 반기는 우리동네 빵집 주인 아가씨는 웃음꾼이다 ㅡ 오셨어요 어르신, 이 쪽이 방금 구운 빵입니다 ㅡ 어르신은 좀 그러니 바꿔 불러주면 안 될까요 ㅡ 아 예, 선생님이라 부를까요 ㅡ 아니 동네 아저씨니 아저씨가 친근해서 좋아요 ㅡ 네 아저씨, 오늘 서비스로 초코빵 하나 더 넣었습니다 ㅡ 아이고 참 우리 여사장은 마음씨짱이네 ㅡ 짱이요? 그것도 마음씨짱이란 예쁜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아저씨짱입니다! 동아일보 손진호 어문기자의 책 《우리말글》에 언급된 말글 '마음씨짱'을 슬쩍 빌려 썼다가 '아저씨짱'이란 흐뭇한 소리를 들었다

2022.03.20

哭, 아이고 아이고!

哭, 아이고 아이고! ㅡ 1960년대 내가 열 살 무렵 상갓집 가시는 조부는 곰방대 털어 놋재떨이에 반듯하게 올려놓고 거울 앞에 앉아 긴 수염을 가위로 다듬고는 두루마기 곱게 펴 제대로 차려 입고 "입성 잘 차려 입어라 강대골(양녕대군 묘지 동네 상도동) 김 씨댁 문상 가야 하니" 짚세기 사잣밥에 조등이 걸린 대문 들어 문상객 접대 술상들로 시끌시끌한 마당을 지나 대청마루 올라 굴건제복의 상주가 지키는 상청에 향 올리고 절하는 조부는 아이고 아이고! 상주 따라 곡을 하고 나 역시 아이고 아이고! 합창을 했다 술 한 방울도 입에 안 대는 조부는 떡에 돼지고기 몇 점으로 문상객들과 담소한 후 내 손을 잡고 귀가하면서 구성지게 곡을 따라하는 손자가 신통해서인지 "잘 했다, 문상할 때는 꼭 그렇게 곡을 해야 하..

2022.03.18

빵돌이

빵돌이 ㅡ 당ㆍ콜레스테롤ㆍ혈압 등 종합병원인 사람이 제 분수를 모르고 아직도 냉면 해물칼국수 막국수 같은 면類를 좋아하는 것도 모자라 쌀로 만든 막걸리에, 크로와상 소보로 케이크...온갖 빵을 마다하지 않는다. 프랑스인들이 독일로 들어오면 다크 브레드를 사재기해 가고 독일인들이 프랑스로 놀러 가면 바게트를 사재기해 온다. 프랑스 독일인들이 유럽 다른 나라 여행에 빵을 들고 가면 허그로 달려와 환영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나의 아침은 호박죽이나 마일드한 커피에 부드러운 식빵이나 마늘 바케트 한 쪽이다.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는 종종 옥수수차에 편의점 단팥빵으로 때우고 여행 시에는 인근 장터에서 떡이나 김이 솔솔 나는 술빵을 사서 배낭에 넣어 다니며 뜯어먹는 자유를 만끽한다. 밀가..

나의 이야기 2022.03.16

어머니 그리고 시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어머니 그리고 시 - 단풍 든 가을 치매 진단 받은 어머니 병원 모시고 간다 병원 진찰하고 약 탄 후 “뭐 잡수고 싶으세요” “갈비탕” 자주 가시는 단골 갈비탕 집 질리지도 않으신 모양이다 가을 구경시켜 드리려 가까운 숲을 찾았다 느린 걸음 산책하시는 어머니 난 벤치에 앉아 시첩을 꺼내 뭔가 끼적거렸다 어느새 다가오신 어머니 “시 쓰냐?” “네 그냥 요” “시가 재미있냐?” “재미는요 뭐 그냥 쓰는 거지요, 옛날에요..... 서양사람인데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짓는 일이고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하이데커’ “그래?” “이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래 시 쓰는데 무슨 죄가 있겠니” 성질 급한 단풍 하나 어머니 ..

2022.03.07

배신

배신 ㅡ 시인이 섬에 갔다 지난 번 발자국을 찾다가 파도가 한 일 깨닫고는 낮은 모래 언덕에 사는 메꽃에게 그간의 안부 물었더니 나도 보고 싶었다 와락 반기는데 키 작은 순비기나무는 바람 불러 크게 몸을 흔들고 여러 해 산 통보리사초는 나잇값 하느라 웃고만 있었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 . . 그리움은 땅 속에 묻혀도 보인다구요 대나무로 보이고 메꽃으로 보이고 순비기나무로 보이고 통보리사초로 보이다가 금방 모래밭에 파묻힌다구요 시인이 세월의 발로 쓴 이 시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시가 功을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지금 이 섬에는 연예인 몇이 밥 먹고 떠들다 간 그 발자국을 찾는 이들로 넘친다 갯메꽃 순비기나무 통보리사초는 여전히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22.03.06

유쾌한 신도림역 까치

시집 《'노량진 극장' 중, 2008 우리글》 유쾌한 신도림역 까치 - 나는 교류 25000 볼트가 흐르는 1호선 신도림역 상공에 거주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곡예사다 시커멓게 그을린 깃털을 움츠리고 도림천변 다리 밑에 썩고 있는 나의 종족을 종종 본다 그래도 나는 고압선 사이를 날아다니며 들고나는 전동차와 벌이는 아슬아슬한 유희가 좋다 그가 종일 쏟아내는 플랫폼 사람들 표정이 울고 웃고 너무 재미있다 한가한 대낮 전철 맨 뒷문 앞 예쁜 여자 스커트자락 밑동 흘린 새우깡 부스러기를 주워 먹다 엉큼하다 발로 내 치인 적도 있다 움찔 놀란 척 날 생각도 안하고 뒷걸음질 쳤지만 실제 놀란 건 아니다 50 센티미터도 안 되게 가까이 가 보았자 정신 놓은 사람들은 아는 척도 안한다 그래도 먹을 것 있는 냥 바..

2022.03.01

낙지집

낙지집 ㅡ 젊은 시절부터 즐겨 먹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힐 정도의 매콤한 낙지볶음을 여전히 좋아한다. 서울 낙지볶음의 탄생지 무교동하고는 원래 친했다. 염세주의에 빠져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던 학교가 지척이고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던 직장 동네였다. 이러니 지금은 거의 사라진 옛 낙지집들 생각만으로도 다동 무교동 청계천 수송동에 이르는 오밀조밀 그 골목골목 집들이 떠올라 정겹다. 냉면 대접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호기를 부리던 시절에, 겁대가리 없이 딱 한 번 유치한 치기로 소주를 세 병 부어 원샷 하려다 목구멍에 사레들려 죽을 뻔한 기억도 있다. 초가집 실비집 이강순낙지 등등에 그 유명한 유정낙지집은 현재 조선일보사 뒤로 이전했는데 현대화된 테이블도 변질된 매운 맛도 마음에 안 든다. 예전 낙지집들은 실내에..

나의 이야기 2022.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