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 시집 《가엾은 영감태기》 함께 감상하기
- 영담 박호남(문학박사, 한국공연예술원 원장) -
인사동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 「인사도(仁寺島)」 모꼬지를 주도하시는 박산 시인의 시집을 받고, 아직 문인으로 이름을 내지 못한 내가 어떻게 시를 읽고 글을 써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시집을 읽으며 시인과 친근감과 공통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먼저 시인이 성장하고 자란 지역이 ‘노량진’이라 어린 시절 그 지역에 대한 묘사가 아주 실감나게 다가왔다. 나도 대방동에 있는 ‘강남중학교’를 다녔기에 노량진 철교와 여의도 비행장은 비교적 자주 가던 곳이다.
둘째,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한 쓰라린 경험과 이를 승화한 시를 쓰면서 도가와 선가의 풍모를 나타내는 모습이다. 나 역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분노에 휩싸여 상사와 다투다 그만두고 백수로 지내기도 하며 아슬아슬하게 직장생활을 이어나갔었다. 이 때문에 도교와 불교 참선, 요가 등에 빠져 지내던 시간이 길었다.
셋째, 회암사지에 관한 시에서 보이듯 불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박산 시인의 진지한 구도의 정신이다. 나도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학을 전공하면서 동양철학에 심취하였고 불교 윤리학으로 석박사 논문을 썼다.
넷째, 박산 시인은 비즈니스로 세계를 오가며 많은 풍물을 보고 경험하여 이를 시에 투영하고 있다. 나도 유학과 재외동포 업무를 오랫동안 맡아 해외 주재도 하고 동남아와 인도에 대한 많은 풍물을 접하고 이를 글로 풀어내려 하고 있다.
다섯째, 박산 시인은 현실의 실존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실존을 넘어선 청빈한 이상 추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이러한 갈등을 고전 문학의 심오한 철학으로 해소하고 있다. 나도 고전 문학을 좋아하여 한문 고전을 많이 읽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를 자신의 문제를 해소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박산 시인의 글을 읽으며 오래된 미래와 같은 친근함을 느끼게 되어 시인의 양해를 구하고 이러한 다섯 가지 측면에서 일종의 감상문을 적기로 하였다.
1. 추억의 소환
아이야
한강 철교 아래 은빛 모래밭
철길 넘으려는 기적소리 들리는
거기로 가자
아이야
빨간 난닝구 유신이가 모래성을 쌓고
고물상집 국영이가 대나무 낚시 놓는
거기로 가자
아이야
샛강엔 능수버들 화들짝 푸르르고
여의도 비행장 비행기 구름 향해 오르던
거기로 가자
(……)
아이야
수염이 긴 할아버지 두루마기 소매에서
사육신묘지 제사떡이 불쑥불쑥 나오던
거기로 가자
아이야
미군 MP와 사는 누나 둔 호태와 놀다
씨레이션 깡통을 깠다가 고기 횡재를 했던
거기로 가자
(……)
―<노들나루 1960’s> 중에서
나도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놀러다니던 그때의 한강철교와 수영을 하던 한강이며, 당시의 가난하던 생활, 서예를 잘해서 서울시에서 특상을 받은 중학교 친구의 집에 가서 쌍둥이 누나들과 화투를 치던 기억, 대방동 골목길을 가다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의식을 잃고 남의 집에 누워 있던 기억 등을 저절로 소환하게 된다. 이 시를 통하여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당시의 모습을 이제는 전혀 찾을 수 없기에 이 시는 역사적인 기록이 될 것이다.
2. 인생의 교훈
♣
(……)
건설사 접대로 그 비싼 룸살롱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90년대 가오마담들 황태자 대접에 우쭐해서는 어깨에 뻥만 잔뜩 들어가서 온갖 개폼이란 개폼은 다 잡았다, 실은 수주에 중요한 Customer인 건설사들에 때론 비굴하기까지 했던 100% 乙이면서도 객기만 충만했다.
천성이 상명하복이 안 되니 상사의 지시에 건건이 자신의 의사를 꼬장꼬장 앞세워 조직에 부적응했지만 운이 좋아 나름 그 속에서도 직위를 올려가며 스무 해 가까이 버티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땅에 형제들끼리 사업이랍시고 벌였지만 남보다 못한 행태에 객기는커녕 인생이 허무해졌다.
(……)
―<객기> 중에서
“천성이 상명하복이 안 되니 상사의 지시에 건건이 자신의 의사를 꼬장꼬장 앞세워 조직에 부적응했지만 운이 좋아 나름 그 속에서도 직위를 올려가며 스무 해 가까이 버티었다.”
나도 객기를 부리며 윗사람과 된통 싸우고 직장을 그만둘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높은 권력층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10년 후 어디 기관장으로 가 있었다. 우연히 그곳에 들렀다 만나게 되었는데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아주 겸손하게 악수를 청하며 그제야 반갑다 인사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얘기를 들으니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 한다. 나와 다툰 일로 충격을 받아 그리되었나 싶어서 너무 미안했다. 사바세계는 참는 세상이라 했는데 이를 어겼다가 상처만 무수히 남겼다. 참 미안한 일이었고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3. 회암사와 구도 정신
맥이 빠지고
의욕이 사라진 날엔
양주 회암사에 가보세요
화재로 사라졌던 절이지만
돌덩이 하나하나
조각조각 부서진 기왓장
우뚝 선 당간지주
여기저기 깔린 주춧돌들
깜짝 놀라게 큰 궁궐 같은 256칸 절터
발로 밟으며 손으로 만지며
여기저기 퍼즐을 맞추다보면
쓰렸던 과거도 끼어들고
기뻤던 순간들도 튀어나오는
회암사지 타임머신의 창가에는
천보산 산안개 자욱이 내려와
부도에 새겨진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휘감다 천상으로 오르지만
구름 떠난 자리에 선 나는
새삼 이승이 좋아졌고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워져
번잡하고 이기적인 도시로
다시 가고 싶어졌지요
회암사에 가보세요
―<회암사에 가보세요> 전문
회암사는 고려의 사찰이며 한국의 선맥을 잇는 삼대화상인 지공, 나옹, 무학 대사를 모신 절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노쇠하고 병이 든 문정황후가 서거하자 유학자들이 몰려와 절을 파괴하고 불 질러 없어졌다. 1998년 1차 발굴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인도의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한 지공 화상이 나란다 대학을 본떠 세우고 전법을 한 절이라 현재 발굴된 절의 모습을 보면 인도의 양식을 본받은 거대한 석조물들이 많다.
박산 시인은 이 절의 석조물과 천보산의 안개를 보며 이승을 그리워한다. 육안이 아닌 지혜안과 법안을 갖춘 구도자로서 이승을 그리워하니 이는 필시 도인의 일이겠다.
4. 세계 속의 서정
괴테 형님께서
그리 좋아하시는 그 많은 여성들을 만날 때마다
작품에 깊은 감성으로 인간이 지니는 본성의 자유를 투영했다는 사실입니다
―<괴테 형님!> 중에서
비프 브르기뇽, 빠에야, 동파육, 똠양꿍, 파스타, 피자, 마라샹궈…‥ 세계화된 Korea의 입들은
―<입의 똘레랑스> 중에서
아주 오래전에
빡빡한 일정의 아테네 출장 중에도
작은 줄만 알았던 실제로는 큰 섬 크레타섬을 갔다
오로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나무 십자가 비문 앞에 서고 싶었다
물어물어 언덕을 올라 무덤 앞에 섰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Είμαι λέφτερος
―<고백> 중에서
여성에서 구원을 찾은 괴테-파우스트에서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천상으로 인도한다’며 종지부를 찍은 괴테, 창작을 하려면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프랑스의 똘레랑스(남의 문화와 관습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지구촌 한 가족이 되는 동화 정책,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와 개인 중심의 화신으로서 구속됨이 없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았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접하면서 바쁜 시간을 쪼개어 문학의 산실을 찾아보는 정성, 술독이 비었어도 향기가 남아 있듯이 문호는 떠나고 없어도 인연 있는 자리에서 좋은 시가 저절로 생성되지 않을까 한다.
5. 현실과 고전적 삶
딱 봐도 한눈에
술이 고파서 찾아 온 벗이
구린 입도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에
이보시게
마침 내가 목이 컬컬한데
술 한잔 어떠신지!
―<쾌설(快說)> 전문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남루하고 쓰라리다. 조직 사회에서 개인은 하나의 부속품이며 이러한 현상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번 낙오하면 다시 회복하기 힘든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러한 걱정은 살아가는 내내 근본적으로 잠재되어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이다. 실존의 문제로 이를 접근하여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가 되면 철학과 자유주의를 배제하고 종교에서 구원을 찾게 되고, 니체에 이르러야 철학과 문학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양에서는 이와 조금 다르게 고매한 인격 수양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간다. 도교, 불교, 유교가 삼교 합일을 이루면서 결국 하나의 중심을 향하는데 그 중심은 천지인의 조화이며 중생과 어울려 사는 일이다. 도가 높을수록 아수라장과 같은 세계로 돌아가 이들과 하나가 되면서 품격을 지키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박산 시인이 「쾌설」에서 김성탄과 같은 대문호를 격의 없이 친구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러한 풍모라고 여겨진다.
이처럼 세계를 바람처럼 누비며 인생을 보내다가 늦게 창조의 길에 들어선 문인들을 주역으로 풀어본다면 풍지관(風地觀)의 괘에 해당한다. 땅을 나타내는 지괘가 위에 있고 아래는 바람을 나타내는 풍괘가 합쳐서 드디어 세상을 관조하게 되어 세상의 고통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재의 특질을 가진다는 괘상이다. 작가의 본질은 온 세상을 누비는 바람이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따라 갈등과 풍파가 끊이지 않지만 서서히 세상을 보는 안목과 해석하는 관점을 형성하여 드디어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나서게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간단하게 박산 시인의 제5시집 가엾은 영감태기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여 보았다. 추가로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섬세한 감성과 절제된 시어에 대해서는 많은 동료 시인들께서 보다 높은 식견을 제시할 것이다. 좋은 시집 원고를 보내주신 시인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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