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分ㅡ
5ㆍ16나고 몇 해 지난 한강다리 노들나루 동네 서낭당 고개 넘어 작은 골짜기 얼기설기 골목에는 기와집도 루핑집도 아니게 지어진 허술한 집들이 몰려 있었는데, 대문도 없는 집 문간방에 상투 틀고 망건에 명심보감 들고 수염 쓰다듬으며 긴 곰방대 두드리며 사는 아저씨가 있었다. 눈 오시는 날임에도 뒷짐 지고 팔자걸음으로 골목 내려가다 자빠져서, 시장바닥에서 채소 장사하는 마나님 단칸방 3년 수발 받다 돌아가셨다, 동네 어른들 수군거리길 "양반은 무슨 얼어 죽을 양반이야, 이 대명천지 깬 세상에! 가난에 찌든 새끼들하고 마누라만 죽을 고생이지! 명분은 무슨 개뿔!" 하였다.
호텔 같이 화려하고 큰 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으로 상청에 국화꽃 한 송이 올리는데, 고인이 앞을 보게 거꾸로 놓아야 한다고 어깨 으쓱! 참견하더니, 오랜만에 얼굴 보는 지인들과 편육에 육개장으로 소주 한잔하려 잔을 부딪는데도 갑자기 무슨 긴한 얘기라도 하려는 듯 목소리 낮춰 "어이! 상갓집에서 이게 무슨?"하고는 만남의 반가움을 깨는 이가 있다. 예전 집에서 장사 지내던 시절 상가가 조용하면 상청 뒤에 누워있는 고인이 외롭고, 상주들 슬픔을 덜어주는 의미로 술 마시고 큰 소리로 떠들며 노름하는 게 우리네 일반적 전통의 모습이었다.
"이 대명천지 깬 세상에 뭔 그리 명분 아닌 명분에 집착하려는지?"
옛적 동네 어른들 흉내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