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산바라기
장면 1 응당 먼 길 가는 자者는 땅 살펴 걸음걸이 재고 이리 저리 고개 짓도 겸손지덕(謙遜之德)해야 하거늘 힘만 잔뜩 들어간 눈동자로 못 오를 하늘만 보고 걷다가 발부리에 돌이 살짝 걸렸는데도 끼우뚱~ 엎어질 뻔했지요 어깨 곧추 세워 다시 가는데 발목이 시큰하고 허리를 접질렸는지 욱신거림이 한움큼이라 오른손 주먹 꽉 움켜쥐어 뒤로 팡팡 두드려 보니 뭉친 살점이 풀어지면서 굽은 등뼈가 다시 서는 순간 트림 한 번 꺼억 하고 먼산바라기 떠 있는 구름에 입 벌려 속 시원히 숨을 고릅니다 다시 뚜덕뚜덕 길을 갑니다. 이번에는 하늘이 심술 났는지 비를 툭툭 뿌려댑니다 손에 든 우산도 없고 몸뚱어리 싸고 가린 것도 얇아 훤히 드러난 팔에는 닭살 같은 소름이 촘촘히 돋았으니 본능이 종종걸음을 재촉하여 근처 야트막한 비탈 잎사귀 우거진 나무 아래 찾아 가쁜 숨 몰아쉬며 허리 움츠려 쭈그려 앉았지요 흔들리는 잎사귀들 위에 위태로이 놀던 물방울들이 송송 떨어져 귀와 볼을 적시며 콧김과 어우러져 간지럼을 주는데 손가락 비벼 가만히 귀 기울이니 바로 머리 위에서는 호로록 호로록 딱새들 소리가 빗방울에 반주되어 들립니다 나처럼 피난 온 새인지 둥지 틀고 앉은 텃새인지 분명치 않으나 지금 이 순간 비를 피하려 웅크리고 있는 건 같은 신세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는 멈추고 먹구름은 하늘 외줄기 빛을 이기지 못하여 저쪽 산등성이 끝으로 사라져 가는데 비 맞은 나그네 굽은 등짝은 김이 모락모락 합니다 새삼 하늘 참 맑다 생각한 나그네 풀어진 눈으로 그저 무심한 발길로 먼산바라기를 합니다. 아직 갈 길이 남았거든요 장면 2 나이 스물 몇 살에 멋모르고 뛰어든 직장이라는 집단에는 술이 있고 돈이 있고 할 일이 있었는데 앞으로 가는 건지 뒤로 가는 건지도 느끼지 못한 체 발톱이 빠지게 달려가면서도 숨이 차지 않았으니 뛰고 있었는지도 몰랐지요 그러고 그러다 그 집단의 불균형에 마찰음이 커져 에이~ 하고 결국 나만의 고독한 집단을 만들게 되었지요 거기나 여기나 역시 그 술과 그 돈과 그 일에 가위눌려 떠있는 해 응시한 지 오래고 휘영청 보름달 마주한지 오래고 총총 별을 따 본지도 오래였지요 눈眼자위는 평심平心을 잃은 지 오래고 돈 들여 하는 운동도 단지 술을 맛있게 먹기 위함이고 통장에 늘어가는 동그라미 숫자는 일 그 자체를 혹사하기 위함이었지요 사람은 이미 새로운 만남으로 가득 메워졌고 옛 친구는 멀리서 측은히 바라 볼 뿐 이었지요 그러다 어느 한 순간 자신이 만들고 펴 보던 익숙했던 숫자의 불일치에 쫓겨 숨을 곳도 없는 망망대해 한 가운데 떠서 긴 한숨만 토吐하게 되었지요 그러고 어찌어찌 세월이라는 명약名藥의 효력을 받아 육지 한 자락 겨우겨우 다시 밟아 이곳저곳 헤매고 다니길 얼마 만에 시골 어느 교회 종탑 십자가에 무릎 꿇어 기도하였는데 보여야 할 구원은 올 생각도 안하고 두 겹 세 겹 겹쳐진 십자가는 형체 변형되어 뭉쳐진 지폐 덩어리로만 보이는데 계속된 위선의 기도는 탐욕의 욕망만 더 키워가더니 분을 삭이지 못한 머릿속 실핏줄은 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터지고 말았지요 깨어나 다시 보니 돈과 술과 일들이 한결같이 모두 다 작아져 있었어요 시간이 모아 온 세월은 티끌처럼 조금씩 가더니 그 작아짐에 일상은 평온하고 더 이상의 큰 아픔을 저만치 멀리한 채로 멀찌감치 돌아 왔던 그 고통만을 간직하고 있었지요 과거로부터 돌아와 앉은 지금은 빠져있는 머리카락 숫자만큼이나 텅 빈 공허가 자리하고 있지만 오랜 습관이 주는 불뚝불뚝 솟는 욕망은 빈한貧寒이 가져온 단순함에 잠잠해집니다 그리곤 자주 아무 생각 없이 먼산바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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