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박받는 삼식이 33

부러운 놈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부러운 놈 - 잘잘 끓는 아랫목에 누워 마누라 엉덩이 통통 두드리다 조물조물 허리라도 안을라치면 실쭉 눈 흘겨 이부자리 밖으로 톡 튕겨 빠져나가며 “아침밥 지어야지” 그 한 마디가 남긴 작은 공간의 갑작스런 썰렁함이지만 가진 것 많지 않은 꽃자리 좁은 남편에겐 가슴 그득 큰 행복이다 별 볼일 없는 쥐꼬리 월급쟁이 하릴없는 소시민 지아비를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는 지지리 공부 못하고 얼굴까지 못생긴 아들놈이지만 어깨가 부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고 곧 늙어 힘 빠질 우리 아부지 제일 좋아하는 술 안 받아주는 놈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하겠다는 딸년은 가슴 속에 넣고 다니는 또 다른 큰 행복이다 잘사는 놈이 10박 며칠 유럽여행 가자 해도 내 꼬락서닐 알아야지 ..

2022.12.18

셋째 번 단추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셋째 번 단추 - 오래전 미국 회사 일을 할 때 얘기입니다 부모가 러시아계라는 아시아 담당 마리나는 항시 가슴에 셋째 번 단추를 상대방이 보기 좋게 풀어 놓았지요 내가 보기에도 그녀의 크고 예쁜 가슴은 매력 덩어리였어요 움직일 때마다 그 흔들림에 탄력이 넘쳤지요 점잖지 못한 욕망을 잘 억제해야 군자라고 아주 잘 교육받고 자란 이 한국 촌놈은 그녀와 마주한 미팅 시간이 고역입니다 정면으로 마주 보고 얘기를 하자니 그녀의 가슴에 자꾸 신경이 쓰였지요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난감했지요 홀로 얼굴 붉히다가도 내심은 여성의 아름다운 가슴을 보고도 무감각하다면 그건 죽은 놈이나 진배없다고 스스로 자위했지요 어쨌든 매번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하는 부자연스런 나를 ..

2022.09.06

휘뚜루마뚜루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우리글 2011》 휘뚜루마뚜루 - 신 게 질색인 홀아비는 배만 먹었고 단 걸 싫어하는 독신녀는 사과만 먹었다 홀아비는 항상 여자가 고팠다 독신녀는 남자가 필요했다 어쩌다 둘이 눈이 맞았다 혀도 맞았다 신 게 별 것이 아니었고 단 거 또한 별게 아니었다 사과 맛들인 홀아비와 배 맛들인 독신녀는 휘뚜루마뚜루 걸신들렸다 맵고 쓰지 않는 한 둘은 지금 행복하다 * 휘뚜루마뚜루 :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 치우는 모양

2022.05.17

나는 컴퓨터다

시집 《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나는 컴퓨터다 - 이끼 낀 내 하드웨어는 매일 먹는 고혈압 약 몇 알에 잠잠하고 수전증 걸린 내 마우스는 알코올 몇 방울에 종종 의존하지만 삐걱거리는 바디 역시 눌러 지압할 스위치만 잔뜩이다 내장된 소프트웨어 몇 개는 헐어 아예 갈아야 하는데 몇 종류의 위장약은 내성(耐性: tolerance)만 더 키우고 삥삥 아프게 소리 나는 건 점점 더하다 사람은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다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모니터는 성기이고 바이러스에 약한 컴퓨터는 비아그라를 찾는다 나는 컴퓨터다 * 진화론의 이론적 구조(이기적 유전자: selfish gene)를 쓴 Richard Dawkins는 “사람은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전파를 위해 만든 생존 기..

2022.02.21

은사시나무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은사시나무 - 야트막 산길 “어디 가세요!” 잎새 잃은 은사시나무가 외쳐요 쓰윽 쳐다보니 삐쩍 말라 키만 멀거니 큰 벌거벗은 모습 어찌나 추워 보이던지 떼로 모여 사는 녀석이 왜 저리 청승맞게 홀로 떨어져 있는지 “왜! 그건 알아 뭐하게!” 생각 없이 뱉어버린 짧고 퉁명스런 짜증에 나무 꼭대기 몇 장 안 남은 잎사귀들 어쩔 줄 몰라 팔랑거려요 짠한 마음으로 다가가 어루만져 속삭였지요 “사실은…‥ 갈 곳도 없이 그냥 가는 거야” 그제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 나도 그냥 서 있는 거예요 너무 외로워서…‥” 등 뒤로 찬바람이 불어왔지만 이미 깊은 사이가 된 듯 서로의 가슴을 비볐지요

2021.10.14

웃다

김명옥 화가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 2011 우리글》 웃다 ㅡ 한강 다리 중간 즈음 노을이 붉게 타는 방향 난간을 잡고 어떤 사내 하나가 큰소리로 웃고 있다 지나가는 차들이 힐금거렸다 택시 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 저런 꼴통 같으니 만만한 게 아래 흐르는 강물이니 제 잘난 맛에 저러지 ” 트럭 탄 프로이드가 말했다 “ 그래 웃어라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면 다리위서 저리 웃겠나 더 크게 웃어라 울지만 말고 ” 버스 탄 칸트가 말했다 “ 뭔가 생각지도 않은 대박이 터졌구만 틀림없어 로또가 터졌어 ” 자가용 탄 베르그송이 말했다 “ 못 볼 걸 봤어 틀림없이 저 친구 빚쟁이가 죽었나? ” 노을이 저물어 가는데도 사내는 계속 웃고 있다 웃다 그리고 웃다 웃다 그리고 ..

2021.08.05

휘뚜루마뚜루」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2011 우리글≫ 「휘뚜루마뚜루」 신 게 질색인 홀아비는 배만 먹었고 단 걸 싫어하는 독신녀는 사과만 먹었다 홀아비는 항상 여자가 고팠다 독신녀는 남자가 필요했다 어쩌다 둘이 눈이 맞았다 혀도 맞았다 신 게 별 것이 아니었고 단 거 또한 별 게 아니었다 사과 맛들인 홀아비와 배 맛들인 독신녀는 휘뚜루마뚜루 걸신들렸다 맵고 쓰지 않는 한 둘은 지금 행복하다 ※ 휘뚜루마뚜루 :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 치우는 모양

2021.05.04

구박받는 삼식이

「구박받는 삼식이」 48쪽 구박받는 삼식이 - 광삼씨는 29년간 꼬박꼬박 출근해 열심히 일했다 그 덕에 새끼들 공부시키고 알뜰살뜰 마나님 모시고 그냥저냥 남들만큼은 살았다 올해로 퇴직 이 년 차 쓰고 남을 정도로 넉넉히 모아 놓은 돈은 없지만 공부 끝낸 아이들 직장 다니니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삼십 년 경력 ‘살림의 제왕’ 마나님께서는 출근 안 하고 집에 있는 서방이 측은했던지 처음 두어 달 정도는 점심밥도 차려 주셨다 퇴직 후, 딱히 정해 놓고 갈 데 없는 광삼씨 아침 운동 뒷산에 올랐다가도 돈도 아낄 겸 꼭 돌아와 집밥을 먹었다 책 보러 도서관에 갔다가도 마나님도 볼 겸 꼭 돌아와 집밥을 먹었다 학교, 동네, 사우나, 다양한 친구 모임 컴퓨터배우기 봉사활동 헬스클럽 등등 잡사雜事에 하루 일정 빡빡한 ..

2020.10.26

부러운 놈 -

「구박받는 삼식이」 86쪽 부러운 놈 - 잘잘 끓는 아랫목에 누워 마누라 엉덩이 통통 두드리다 조물조물 허리라도 안을라치면 실쭉 눈 흘겨 이부자리 밖으로 톡 튕겨 빠져나가며 “아침밥 지어야지” 그 한 마디가 남긴 작은 공간의 갑작스런 썰렁함이지만 가진 것 많지 않은 꽃자리 좁은 남편에겐 가슴 그득 큰 행복 이다 별 볼일 없는 쥐꼬리 월급쟁이 하릴없는 소시민 지아비를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는 지지리 공부 못하고 얼굴까지 못생긴 아들놈이지만 어깨가 부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고 곧 늙어 힘 빠질 우리 아부지 제일 좋아하는 술 안 받아주는 놈 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하겠다는 딸년은 가슴속에 넣고 다니는 또 다른 큰 행복이다 잘사는 놈이 십박 며칠 유럽여행 가자 해도 내 꼬락서닐 알아야지 하고 참고 그냥저냥 만만..

2020.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