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 돌아가는 길

박산 2025. 8. 29. 08:05

빙 돌아가는 길 여름 숲 (2025)

 

빙 돌아가는 길 ㅡ



BMW인 나는

아침 지하철 가는 길을

두 시간 일찍 나가

아파트에 붙어있는

야트막한 산 숲길로 빙 돌아갑니다

  

단풍나무의 음전한 침묵에 동조하고

키 큰 밤나무에 친한 척 웃어 봅니다
  

그리고는

늘 푸른 저 소나무 앞 작은 바위에 앉아

가눌 수 없는 슬픔으로 넘쳐흐른 저 끈끈한 松津이

어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에 꼭 엉겨 붙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비탈리의 ‘샤콘느 in G Minor’를

더 처절한 소리로 엉켜 내게 된 그 사연을

귀에 든 바람이 준 소식으로 듣는 중입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고

오늘 할 일과

내일 만나야 할 사람을 생각합니다

 
저만치 들리는 뻐꾸기 소리에

가빴던 숨은 안정되고

정신이 맑아지니

빙 돌아가는 길 발걸음은 더 가볍습니다

지나온 날들은

지름길만 죽어라 찾아다녔었는데…,

늦게 철이 들어

느림의 미학을 이리 익히는 중입니다

 
빙 돌아가는 길에서는

그간 에둘러 애먹였던 것들이

어깻죽지 아래 퇴화했던 상상의 날개로 살아나서

훨훨 날아가는 신비한 경험도 합니다

 
엊그제부터 정형외과 약을 복용 중임에도

이리 삐끗 저리 뚝 저리고 아팠는데

빙 돌아가는 길의 치유로

어깨가 시나브로 가벼워졌습니다

 
빙 돌아가는 길에는

안 보이던 게 보이고

잊고 살았던 것들이 나타납니다 

 

통상사절단 일원으로(1999, 이스탄불)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아우  (8) 2025.09.16
천작(淺酌)  (10) 2025.09.10
인사동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286‘  (10) 2025.08.23
뒤듬바리  (14) 2025.08.17
광장에서  (9) 2025.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