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천 소묘

박산 2017. 11. 6. 09:51


                                                             -산국화-



공지천 소묘 - 


가을이 덜미를 움켜쥔 잔잔한 호숫가에 앉았다 
나무가 뱉어낸 옅은 신음으로 나뭇잎들이 붉다 

뻗어나가는 줄만 알았던 것들이 여기 와서 쉬는 중인데 
물만 먹어도 배부른 물고기가 공연히 펄떡이다 
가만히 서있는 척 음흉한 왜가리 긴 주둥이에 걸렸다 
물 한 모금 못 마신 내 배도 불러왔다 

저만치 산 아래 도로를 휘익 지나는 자동차가 한가롭고 
한 떼의 늙음을 모시고 소풍 나온 보호사 아줌니들은 
무심한 휠체어 바퀴를 따라 구르고 있다 

물가 가시박 넝쿨 속에는 뱁새 몇 마리 분주하지만 
백조를 가장한 플라스틱 놀이 배는 한가로이 떠다니고 
벤치에 포갠 연인들의 긴 입맞춤도 급할 게 없다 

강과 바다를 모르는 호수는 행복하다 

(2017 가을 춘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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