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多幸

박산 2017. 8. 28. 11:14


                                                                                  윤영호 히말라야 사진첩 중


다행多幸 - 


사는 게 너무 팍팍해 
짜증도 나고 말이야 
술을 마셨어 

자정이 가까운데도 
도심은 술꾼들로 득시글거렸지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 
별은 총총했지만 
달은 뭔지 모르게 우울 했어 
사정射精한 후의 나른함 같은 게 몰려왔어 

누군가와 쌍시옷으로 삶을 말하고 싶었지 
마누라 붙들고 고주알미주알 떠들긴 싫어 
좋은 얘기도 아니잖아 

영감탱이 소릴 코앞에 둔 친구 놈들 
휴대폰 번호들이 사열하듯 쭉 떴지 
찌든 냄새가 폴폴 났어 
이 시간에 받을 놈이 있을까 

그 중 잘난 척하고는 담쌓고 
아무 때나 눈물 글썽이는 
착하디착한 Y를 눌렀지 
익숙한 트로트 음악이 한참이나 울렸어 
자는 줄 알고 끊으려는데 
“어디야? 같이 마시자” 

중간 접선구역에서 만났지 

마누라 새끼들 몸뚱어리 건강 
정치 대통령 지구의 평화까지 
내겐 가당치 않은 주제를 
쌍시옷 섞어 얘기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없어 

그냥 새벽까지 얘기 들어주고 
맞장구쳐 줄 친구 하나 있음에 다행이지 

 (박산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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