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허(盈虛)

박산 2024. 9. 5. 07:55

 

 

게리 번트(1957~ )

 

 

=영허(盈虛) 

 
1. 위안(慰安) 


아파하지 마시게 

그럴수록 더 아프다데 

슬퍼하지 마시게 

그럴수록 더 슬프다네 

아프다고 마냥 울다간 눈이 빠질 것이고 

슬프다고 넋 놓다간 혼(魂)이 빠질 것이네 

달도 차다가 기울고 

태양도 비추다 사라지듯이 

잿물 삭여 잿빛 우려내듯 

조금만 기다리고 조금만 참아야지 

어차피 흐르는 건 

모났다가 죽어가는 것이 

인생살이 아니런가 

 

2. 동감(同感) 
  

알고 있네, 나도 알고 있다네 

살다 보니 맥없이 엎어져 

몇 바퀴 돌아 뒹굴다 깨지고 

흐르는 핏물도 맹물인가 하였고 

혼 빼고 앉았다가 

잠시간의 제정신에 

와락 울고 싶어지는데 

말라 나오지도 않는 눈물 콧물을 

배출도 못하는 서러움은 

왜 이리 야속도 한지 

시간은 ‘세월’이라는 풍류로 포장되어 잘 흐르고 

인성이 수성(獸性)에 가까워질 즈음이면 

과거의 쓰린 쇠퇴(衰退)는 

망각의 기억 속을 유영(遊泳)하고 

본연이 상실된 번영의 끝 모를 욕정만이 활개 칠 뿐 

그러고 그러다 독하다 소리 여러 번 듣고 

그 독이 온몸에 전이될 즈음 

할 수 없이 도려낸 썩은 환부에는 

참기 힘든 고통만이 인내를 강요할 뿐 

또 그러기를 그러다가 

다시 굳어 돋아난 새살에 

옅은 주홍빛 살이 돋을라치면 

그 밤에는 어김없이 영월(盈月)이 떴다 

 

3. 심산(心算) 

 
꽹과리를 잡아도 

너무 미쳐 두들기기는 싫네 

살랑살랑 머리나 흔들면서 

달랑달랑 어깻짓이나 하다가 

슬며시 두 눈을 감아 버리면 

일그러진 내 입 언저리에 

고대하던 미풍이 다가와 

꽃내음 간질이고 콧구멍 후벼 

아!, 환락일세! 

 

添: 예전처럼 그리 자주 만나지는 못 하나, ‘무소식=희소식’이라고 그냥저냥 잘 지내리라 했던 K 사장의 도산 소식을 들은 건 한 두어 달 전이었다. 어제 갑자기 그가 찾아와 대낮부터 벌어진 ‘술판’에는 삼십수 년 전의 ‘나’의 사업 실패 쓰라림의 기억과 그가 타고 다녔던 벤츠의 위세 좋았던 뻔쩍거림과 그가 그리도 애지중지했던 고급 골프채들이 엉킨 채로, 허탈한 그의 검고 핏기 어린 얼굴에 마구잡이로 춤추며 어른거리고 있었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영허(盈虛)’-참과 이지러지는 달 모양으로 지금 이지러졌더라도 다시 찰 날이 있다. 그 차고 빠지는 ‘순리’만 깨닫게 된다면….  

 

 

시집 《가엾은 영감태기》 중 (예서의 시 2024)



                                                                         (오경복 한옥례 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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