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박산 2023. 7. 19. 06:58

정선 몰운대(박산 찍음)

 

탈출기 ㅡ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산다 해도

순간순간 못마땅한 것에 맞닥뜨리고

때론 버럭 소리도 지릅니다

 
좀 산 양반들은

세상살이 다 그렇다고

짐짓 도사 흉내를 냅니다만

하찮은 騷人인지라

 
몇 번 이런 게 반복되면

아무리 친한 것들도

모든 게 싫어집니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습니다

 
도심 밤길 가다가 떠오르는 이들 있어

고개 들어 본 하늘은 뿌옇게 흩뿌린 모양입니다

거기에는 희미하지만 알만한 얼굴들이

누군 찡그리고

누군 무표정하고

누군 옅은 미소를 띠고

그러고들 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센 빛에 눌려 별빛이 가려지니

헛것 아닌 헛것 들과 이리 조우합니다

 
이 도시를 잠시라도 떠나야지 합니다만

촘촘하게 엮여 사는 빡빡한 현실은

'몇 박 며칠' 비움이 쉽지 않습니다

 
출근도 해야지요

잡아 놓은 약속들도 있지요

들쭉날쭉 날라 오는 세금도 보험료도 챙겨야지요

내과 치과 비뇨기과 안과도 가야 하고

죽는 날까지 숙명인 가족 부양도 해야지요

아참! 내겐 작은 ‘樂’인 낮술도 마셔야지요

 


 
훌쩍 하루만이라도 작정하고 떠납니다

 
고속버스를 타면서 배낭 깊숙이 스마트폰을 찔러 넣었습니다

 
버스 맨 앞자리 창밖 走車看山 풍경만으로도 호흡이 편해졌습니다

 

 
낯선 땅을 걷는 데 저만치서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가 두루마기 펄럭이며 손 흔들며 내게 옵니다, 혹여 얼굴이라도 뵐까 잰걸음으로 가는 순간 구름 되어 하늘로 오릅니다 

 

 
시골 작은 시장 허술한 식당 모든 게 넉넉해 보이는 입담 좋은 고깃집 아줌마가 오늘 잡은 돼지라며 몇 점을 구워 내옵니다, 소금만 살짝 찍었는데도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정말 맛있네요, 생마늘을 된장에 찍어 씹었는데 된통 매운 게 걸려 혼비백산 씩씩거리며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벌컥 마셨더니, 지켜보던 아줌마 재밌어 신이 났습니다, 아저씨 제대로 걸렸네!, 나도 멋쩍게 웃으며 이마에 땀을 훔칩니다

 
어둑어둑해져 군청 옆 모텔방에 들었습니다

 
이 시골 모텔에 웬 자쿠지?

여기 팡! 저기 팡! 팡팡팡! 물을 틀어놓고

실오라기 하나 붙인 거 없는 원시인이 됐습니다

 
거품이 부글거리는 탕에 몸을 담그고는 狂人 에드거 앨런 포의 '글짓기의 철학'을 읽다 보니, 모두스 오페란디Modus Operandi 같은 유식한 수법을 흉내내지는 않을지라도, 나 역시 살짝 정신 줄 놓고 뭔가 쓰고싶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몇 자 적습니다

 
굳이 영혼을 고양한다는 핑계로 성낼 일 만들지 말고

격렬한 흥분으로 욕심낼 일은 진즉에 버리고

홀로 떠나 홀로 찾아야 비로소 보이고 느끼는

그게 자유 자유 자유다!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문장을 붙들고 있는데, 옆방에서 들리는 고양이 소리로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야 든 잠이 비몽사몽 이미 중천에 해 솟은 아홉 시가 넘어서야 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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