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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꼬락서닐 알아야지

박산 2017. 8. 4. 09:55




내 꼬락서닐 알아야지 - 


은퇴 코앞인 경철씨 
봉급쟁이 마누라로 
애들 키우랴 알뜰 살림하랴 
눈가 잔주름 쪼글쪼글 
예뻤던 손등 푸른 심줄이 금을 그었는데 

그 손에 쥔 장바닥 싼티 가방 
어찌나 싼티를 더하는지 
마침 만기된 보험료 
쌓인 이자 찾아가라는 통지 받고
 ‘에라 이참에 마누라 명품 가방 하나 사주자’ 
모처럼 통 크게 마음먹고 
Bottega, 프라다, Gucci, Cartier, Tiffany, 베네통... 
목에 힘 빳빳하게 주고 
백화점 명품 코너를 걸었다 

눈에 별이 켜진 마누라 
삼십 년 결혼 생활에 
이리 살판 날 얼굴 보긴 처음이다 
익숙하게 고르는 모습이 
‘저게 내 마누라 맞나’ 순간 낯설었다 

어정쩡하게 팔짱 끼고 딴청 부리던 경철씨 
이 쪽 저 쪽 실실거리다 거리에서 흔히 보는 무늬 가방 하나 집어 
이리저리 헤집다 가격표를 보았다 
 ‘ 0 하나가 더 붙었나? ’ 

눈 비벼 다시 보았다 
옆에 가방을 들어 보니 
그건 또 첫 번째 숫자 끗발이 더 높다 
보험료 이자론 어림 반 푼쭝도 없다 
입 찢어진 마누라를 뒤로하고 
애써 태연한 척 카드를 긁었지만 
경철씨 제 정신이 아니었다 
‘내 꼬락서닐 알아야지’ 

 (박산 시집 '구박받는 삼식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