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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박산 2020. 2. 4. 11:08
  

                                                         

                                                                               

                                              『默戀김명옥 그림

 


  깨달음 ㅡ 

 무덤에 비문을 세우는 일이 공명空名 된지 언제인데 
 헐고 너절해진 책장을 꽉 움켜쥐고는, 
 전통을 핑계 삼아 사사건건 고리타분한 격식을 주장하는 것도 모자라 
 조상을 들먹이고는 잘난 가문이라 자기도취에 흠뻑 홀로 빠져 있다가, 
 '이놈들만큼은' 하고 믿고 믿었던 
 슬하 후손들이 내뱉는 조소가 쌓이고 쌓여 몰고 온 태풍 같은 모더니즘에 순간 넘어지고 자빠졌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변하지 않는 푸른 네 빛 일줄 알았는데 
 옹이 진 상처, 색 바랜 잎, 떨어져 바닥 여기저기 깔린 솔방울들, 
 푹 파여 튀어 나온 껍질, 세월에 순응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는 어수선한 광경에 
 비로소 철이 좀 드는가 싶었는데, 
 일어나려니 허리가 뻐근하고 눈이 침침하고 먹은 것도 부실하건만 헛구역질이 나와 
 기분전환을 위해 면도라도 해볼까 들여다본 거울에는 
 고집 센 늙은이 하나가 주름 깊게 들어 있다 

 자빠져 보니 그제야 알겠다 

 무덤에 비문 세우기를 접었더니, 입도 열기 싫어지고 무뎌진 상념들이 힘 빠진 체 흐느적거려 
 춤을 추며 자꾸 과거를 끄집어내 우울과 친해지려는 통에 
 '덧없는 시간이라 자책 말자' 교과서적으로 마음 다잡아 웃음을 배우려니 
 얼핏 우선 떠오르는 이름들 
 하늘에서도 누군가를 웃기고 있을 서영춘 배삼용 구봉서 이기동 이주일, 
 웃자! 웃자! 
 산 보고 하늘 보고 바다 보고도 웃자! 
 억지로라도 웃다 보니 진짜 웃게 되면서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내려놓다 보니 
 점점 가벼워지는 홑몽둥이가 느껴지는 중이다